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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에라도 사랑에 빠지고 싶어질 영화, 모드 루이스의 '내 사랑'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보고 나면 당장에라도 사랑에 빠지고 싶어질 영화다. 연인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립고, 혼자라면 혼자임이 한정 없이 외로워질 영화. 세상이 준 고통을 맑은 눈빛으로 가만히 헤쳐 나가며, 가난하되 화사하게 살아갔던 캐나다 화가 모드 루이스(1903~1970).

영화 ‘내 사랑’(원제 Maudie, 7월 12일 개봉, 에이슬링 월쉬 감독)은 그가 무뚝뚝한 어부 에버렛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여정을 뒤쫓는다.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가 심장을 누르고, 누른 듯 절제한 연기가 고스란히 오랜 울림으로 남는, 두 배우의 또 다른 ‘인생 멜로’다.

캐나다 남동쪽 대서양 연안에는 노바스코샤라는 조용한 어촌마을이 있습니다. 가문비나무가 숲을 이룬 완만한 구릉지형은 겨울이면 그린란드 빙하의 영향으로 눈이 발목까지 덮이곤 하지요. 만약 당신이 이 외딴 곳을 찾는다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 때문일지 모르겠어요. 주근깨 소녀 앤이 초록지붕 집으로 입양가기 전에 살던 고아원이 바로 노바스코샤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루시 모드 몽고메리(1874~1942)가 이 소설을 발표하기 다섯 해 전인 1903년 노바스코샤에는 앤과 꼭 닮은 소녀가 태어났습니다. 아네모네 꽃이 만발한 3월 따사로운 봄기운을 눈동자 가득 머금고 세상에 나온 그 아이의 이름은 모드. 훗날 캐나다를 대표하는 민속 화가로 알려진 바로 그 모드 루이스입니다.

‘내 사랑’에서 모드를 연기한 샐리 호킨스의 말대로 “모드의 그림은 첫눈에 미소 짓게” 만듭니다. ‘이래야 한다’는 강박이나 허세 따위는 없어요. 그의 그림 속에선 봄과 가을이 동시에 찾아오고, 다리가 셋인 소들이 더없이 경쾌한 색감으로 그려지기도 하죠. 집 앞 길가에서 단돈 5달러에 내다 팔던 모드의 그림들이 나중에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의뢰받을 만큼 유명해진 건 그의 타고난 천진함과 위트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죠.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는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 그러나 모드의 삶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소아 류마티즘 관절염의 영향으로 등이 굽고 다리를 절어야 했던 모드. 그에겐 한때 ‘아무도’ 없었어요. 어릴 적 양친을 잃었고, 재즈 뮤지션인 남동생은 유산을 탕진한 후 누나를 버거워했거든요. 모드를 떠맡은 고모는 조카를 고통스럽게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여기고, 엄격히 통제했지요. 그 숨 막히는 나날에 항복했다면, 모드는 지금의 모드가 아니었을 거예요. 모드를 지탱한 건 어부들이 나눠 준 색색의 페인트로 그린 그림들, 그리고 그가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결혼한 열 살 연상의 과묵한 어부 에버렛 루이스(1893~1979)였습니다.

모드에게 에버렛이 어떤 남편이었느냐고요? 이 이야기로 답을 대신할게요. 모드는 결코 장애나 고통이 자신의 삶을 규정짓게 내버려두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짓궂은 놀림 탓에 열네 살에 학교를 자퇴하고서도 내 편이 되어줄 친구를 기어코 찾아낼 만큼 밝고 유쾌한 천성을 타고났지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했던 빨강머리 앤처럼요.
하지만 모드가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새겨 넣기 시작한 건 에버렛을 만난 다음부터였죠. 서로의 외로운 삶을 밝혀, 외면해온 자기 스스로의 영혼까지 온전히 껴안게 만드는 사랑. 에이슬링 월쉬 감독이 영화 ‘내 사랑’에 담은 모드와 에버릿의 이야기입니다.

13년
이 놀라운 화가를 알고 나면 누구든 그의 삶을 나누고 싶어지기 때문일까. 모드 루이스의 전기영화가 추진된 건 자그마치 13년 전부터다. 레이첼 맥애덤스를 모드 역에 캐스팅한 영화가 돌연 불발된 적도 있다. 영화화가 궤도에 오른 건, 각본가 셰리 화이트가 모드와 에버렛의 러브스토리에 주목한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서다.


샐리 호킨스 
셰리 화이트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에이슬링 월쉬 감독이 가장 먼저 적은 이름. 그와 샐리 호킨스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와 같은 원작 소설을 토대로 한 BBC 퀴어 멜로 스릴러영화 ‘핑거 스미스’(2005)에서 호흡을 맞춘 후 친구로 지냈다.

월쉬 감독은 호킨스에게 긴 설명 대신 e-메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병세 탓에 관절이 마디마디 울퉁불퉁 튀어나온 손으로 붓을 든 68세의 모드가 자신의 그림으로 가득한 자택 창가에서 온화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보자마자 ‘정말 아름답다!’고 외쳤어요. 모드는 그 놀라운 손으로 눈부신 그림들을 그렸죠. 그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에 출연할 이유는 충분했어요.” 호킨스의 말이다. 그런데 월쉬 감독이 모드 역에 왜 그를 제일 먼저 떠올렸느냐고? 에단 호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샐리(호킨스)는 아주 감성적이에요. 45kg의 순수함 그 자체의 사람이죠.” 어쩐지 모드가 떠오르는 묘사 아닌가.


애처가
에이슬링 월쉬 감독과 샐리 호킨스는 에버렛 역은 무조건 에단 호크여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호킨스는 “에단(호크)만큼 아름다움과 섬세함, 어두운 동시에 자신만의 분위기를 간직한 배우를 못 봤다”고 한다. 물론, 호킨스가 “에단이 열일곱 살에 출연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 피터 위어 감독)의 광팬”이었다는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에단 호크는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과정이 남달랐다고. “어느 날 밤늦게 집에 왔는데, 와이프가 부엌 의자에 앉아 울고 있었어요.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거죠. ‘무조건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약속하라’고 하더군요.” 호크의 말.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건 그와 에버렛이 꼭 닮은 점이다.


나이브 아트 
샐리 호킨스는 모드의 굽은 몸까지 모두 사실적으로 표현해냈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촬영이 끝난 후 저녁마다 스트레칭과 요가로 모드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을 따로 가져야 했다고. 당연하게도,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장면 역시 직접 찍고 싶어 했다.

모드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본능적인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는 ‘나이브 아트(Nive Art)’의 선구자로 불리는데, 호킨스는 촬영 전 수개월 동안 영국 런던의 어느 교회 회관에서 모드와 같은 나이브 아트 화가를 만나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가 배운 건 기술적인 기교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나이브 아트는 어린아이 같은 쾌활함과 솔직함이 특징. 모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호킨스의 가장 큰 과제였다. 그가 가장 먼저 모사한 모드의 작품은 세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그려진 유명한 그림이었다고.


작은 집
3×3.6m 크기의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는 작은 집. 모드와 에버렛이 살았던 이 집에는 모드가 그린 그림들이 장미넝쿨처럼 화사하게 새겨져있었다. 이 집이 모드가 남긴 가장 보석 같은 작품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러나 부부가 죽은 뒤 사람들이 지붕널과 덧문, 문을 떼어가기도 하고, 거센 비바람에 집이 노후하자, 1984년 노바스코샤 주 정부는 주민들의 청에 따라 이 집을 구입, 핼리팩스에 있는 노바스코샤 미술관에 양도했다.

영화에 등장한 집은 노바스코샤와 인접한 캐나다 북부 뉴퍼들랜드 교외지역에 지은 것. 미술관에 있는 실제 집을 정교하게 고증했다. 모든 장면들을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주인공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집의 외양을 표현했다고. 집 안팎에 조금씩 늘어나는 모드의 그림은 샐리 호킨스와 에이슬링 월쉬 감독 등 제작진이 모두 함께 채워나갔다. 2016년 1월 겨울 신 촬영이 끝난 후 작은 집 세트는 아쉽지만, 모두 해체했다.


소울 뮤직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메리 마가렛 오하라가 카누 사고로 죽은 남자친구에게 바친 곡 ‘디어 달링(Dear Darling)’, 싱어송라이터 리사 해니건이 삶과 예술의 매혹을 노래한 ‘리틀 버드(Little Bird)’, 엔딩 크레디트에 흐르는 캐나다의 전설적인 그룹 카우보이 정키스의 대표곡 ‘썸딩 모어 비사이즈 유(Something More Beside You)’ 등 미리 결정된 사운드트랙도 영화에 애잔한 정서를 불어넣었다.


노바스코샤
모드는 불편한 몸 때문에 일생 여행을 거의 가지 않은 채, 작은 집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내다봤다. 멀대같고 말수가 적은 에버렛이란 남자를 매일 조금씩 더 많이 사랑하며. 1930~40년대 노바스코샤의 적막한 풍광은 이 들꽃처럼 소박한 연인의 고요한 러브스토리에 가장 완벽한 배경이었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 에이슬링 월쉬 감독은 여러 회화 작품을 참고하기도 했다. 광활한 시골을 배경으로 한 앤드루 와이어스의 정적이 느껴지는 인물화와 엘머 비숍의 표현주의 그림들이 그것. 물론, 겨울 장면을 촬영할 당시 실제 평균기온이 영하 20도였다거나, 에버렛의 코에 파리가 앉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일주일간 파리 두 통을 모아 풀어놓는 등 아주 직접적인 방식도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큰 영감을 준 것은 바로 모드와 에버렛 두 사람이었지만. 샐리 호킨스는 말한다. “그들은 전기도 없는 소박하고 정말 작은 집에서 살았어요. 그런 불편한 몸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무수한 겨울들을 견뎌냈어요. 그들에겐 놀랄만한 영혼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힘으로 삶은 예술이 되는 거예요.”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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