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나의 힘, 공상은 내 서사의 고향

중앙선데이

입력 2017.07.09 00:17

업데이트 2017.07.1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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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호 08면

[정재숙의 공간탐색] 만화가 윤태호의 화실
교양만화 ‘오리진’의 산실인 서울 동교동 화실. 왼쪽 아래 그림은 ‘미생 2’의 지휘본부이자 작가의 서재인 분당 구미동 화실. 안충기 기자-화가

교양만화 ‘오리진’의 산실인 서울 동교동 화실. 왼쪽 아래 그림은 ‘미생 2’의 지휘본부이자 작가의 서재인 분당 구미동 화실. 안충기 기자-화가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화가인 안충기 기자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육성회비 못내 언어폭력 당하고
무작정 상경해 노숙하던 시절 겪어

교양만화 ‘오리진’ ‘미생2’ 매달려
밤 새우기 일쑤, 보상 심리로 폭음

이 연재물의 일곱 번째 주인공은 만화가 윤태호(48)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 묘사로 우리 내부의 치부를 까발리는 만화 고발자다. 만화 입문 30년을 맞은 그는 자신이 궁금한 걸 주제로 잡아 차근차근 풀어 왔다며 “공상은 나의 창작 태도”라고 했다.

눈이 떼꾼하다. 눈동자에 핏발도 보인다. 밤샘을 밥 먹듯 한다는 만화가의 운명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윤태호 작가는 “그래도 어제는 모처럼 6시간쯤 잤다”며 뿌듯한 표정이었다. 전매특허가 된 탈모 위장용 야구 모자에 텁수룩한 수염, 일할 때 작업복이 된 잠옷도 시간 절약을 위한 단순 생활의 상징 같았다. 하루 2~3시간 취침을 견지하며 달려온 30년 마감 인생을 그는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계속 밤을 새워야 한다는 건 사실이죠. 그 보상심리로 폭음을 합니다. 담배는 하루 한 갑 반. 나날이 견디는 질이 낮아지고 있어요. 몇 년 전까지는 1시간에 한 장쯤 그렸는데 이제 2~3시간에 한 장 진도가 나가요. 최소 시간이 필요한 게 만화작업이라 도리가 없죠. 의학이 발달해 제가 일을 더 많이 하고 술을 더 잘 먹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머릿속에 그렸던 만화가의 작업실은 아니었다. 파지가 휘날리고 먹물이 튀어 오른 너저분하고 퀴퀴한 골방은 없었다. 깔끔하고 질서정연한 자그마한 사무실이었다. 컴퓨터로 원고를 그리게 된 변화 덕이다. 윤 작가는 서울 동교동에 하나, 분당 구미동에 하나, 두 개 화실을 오간다. 화요일부터 토요일 새벽까지는 서울에 머물며 웹툰·웹소설 전문 플랫폼 ‘저스툰’에 연재하는 교양만화 ‘오리진’에 매달린다. 토요일에 분당에 가 잠깐 눈을 붙이고 저녁부터 월요일까지 다음 웹툰 연재물 ‘미생 2’를 마감한다. 그 짬짬이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으로서 꼭 필요한 회의, 인터뷰 등을 처리한다. 해오던 대로 한다는 기분이라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다.

“‘오리진(Origin)’은 100권짜리 책 출판을 목표로 한 10년 대형 기획물이에요. 해외 도서전을 겨냥한 21세기형 만화 백과사전이죠. 제목 그대로 세상 모든 것의 기원(起源)을 미래에서 온 로봇 ‘봉투’가 사람들로부터 배워가는 얘기입니다. 제1권 보온(保溫)부터 에티켓, 돈, 상대성이론, 지도, 노화, 기원 전후, 열쇠, 아름다움, 이런 식으로 이미 주제가 20여 가지 결정돼 있어요. 서사를 중심에 놓은 순만화(純漫畵)라 할까요. 만화로 팟캐스트를 하고 싶었어요. 편집자만 6명이 붙어서 매일 미팅을 합니다. 회의 내용이 엉성하면 답이 안 나오니 치열하고 빡빡하게 하죠. 각 분야 전문가들이라 제가 배우는 게 많죠. 저는 일 잘하는 사람이 좋아요.”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파기 위해서 그가 기울이는 정성도 지극하다. 화실 곳곳에 놓여있는 책의 범위가 방대하다. 그의 가방을 털어봤더니 유발 하라리의 화제작 사피엔스와 두툼한 취재 공책, ‘오리진’ 콘티 파일, 필통이 나왔다. 그는 “이 작업이 끝나면 제 나이 58세가 되는데 우선 제 자신의 발전이 이뤄지고 만화 내용이 좋아지면서 독자도 즐겁게 발전하는 순환을 꿈꾼다”고 말했다.

분당 화실은 문하생 5명이 컴퓨터와 씨름하는 방과 윤 작가의 서재 2개로 분리돼 있다. 개인 공간이 너무 없어서 3년 전 마련한 서재는 쪽잠을 자는 다락방과 서가, 책상으로 단출했다. 8평 이곳에서 그는 읽고 쓰고 공상한다. 책을 읽다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으면 몽상에 빠져들었다는 증거다.

“문하생 시절에 자료 조사를 하느라 주요 작가들 연보를 제 나름으로 써봤어요. 소설가 조정래, 이문열 작가가 떠오르네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쥐고 가는 테마가 몇 개 안 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뭘 궁금해 하는지, 그걸 내 창작의 테마로 삼아야겠구나.”

윤태호의 그 징글징글 기막힌 스토리, 캐릭터는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광주민주항쟁을 11살 소년의 눈으로 보고,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시위에 앞장섰던 고향의 뿌리에서 올까. 육성회비를 못내 언어폭력을 당하고, 만화가 그리고 싶어 무작정 상경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숙하던 시절의 체험 때문일까. 동그라미 시간표대로 생활하며 라면 상자 수십 개에 습작종이를 채우며 독학으로 서사를 체득한 노력 덕일까.
노숙 문하생에서 8평 자기만의 방을 지니게 된 만화가는 “광주는 내 서사의 고향, 결핍은 나의 힘”이었노라고 했다. 독학자로 걸어갈 그의 미래는 극지와 오지를 지나 무한한 판타지의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듯 보였다.

서랍 없는 간결 단정한 서재 

다독가이자 책벌레인 윤태호 작가의 서재에는 정작 책이 별로 없다. 반듯하게 정리된 만화잡지, 상패와 자료, 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이끼’와 ‘내부자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방은 예상보다 단정하다.

그는 책이 병풍처럼 방을 둘러싸고 있는 게 싫다고 했다. 읽고 난 책은 버리고, 중요한 책도 1년 새 찾지 않으면 방출한다. “시간이 없어서 다시 못 볼 테니까” 쌓아두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어린 시절, 그가 그린 그림 수백 장을 부모가 모두 없앤 기억도 영향을 줬다. 모으는 것의 허망함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의 방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서랍 달린 가구가 없다는 것. 안 열어볼 테니까 아예 서랍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필요해서 옆에 둔 사물은 다 밖으로 노출돼 있다. 쉽게 빨리 찾는 방법이다.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필사한 노란색 포스트잇이 책상 옆에 더덕더덕 붙어 있다.

또 하나, 방에 들어서는 순간 텔레비전 뉴스 채널을 튼다. 음악 대신 소음, 사람 소리가 있어야 일이 된다.

윤태호

1969년 광주생.
‘야후’ ‘이끼’ ‘미생’ ‘내부자들’ 등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반향과 파문을 일으킨 만화가. 88년 허영만·조운학 문하생으로 만화계에 입문한 뒤 좌충우돌 다양한 만화 작법을 구사하며 ‘윤태호식’ 독특한 시선의 힘을 길렀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소재로 삼은 ‘야후’, 리더십과 집단주의의 혹을 건드린 ‘이끼’,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다룬 ‘미생’이 잇따라 주목받으며 한국 만화의 새 기수로 떠올랐다.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2015년 제6회 홍진기 창조인상 사회발전 부문을 수상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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