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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감염병, 메르스처럼 국가가 예방대책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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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15년 6월 박모(70)씨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정밀검사 결과 담도암으로 4기에 가까웠다. 가족 권유로 수술 날짜를 잡고 입원했다. 그런데 박씨는 업무 정리를 핑계로 잠깐 퇴원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수술받으면 좀 더 살지 모르지만 가족의 고통, 병원비 등이 부담스럽다”는 유서를 남겼다.

10만 명당 29명 … 12년째 1위 불명예 #노인은 55명으로 OECD 평균의 3배 #청소년 자살도 1년 새 16%나 늘어 #복지부 관련 예산 한 해 99억원뿐 #일본은 7508억 써 자살률 크게 감소 #“새 정부 국정과제에 넣어 관리해야”

최모(18)군은 초등학교 때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실직하는 바람에 유학 비용을 댈 수 없어 지난해 귀국했다. 그는 오랜 해외 생활 탓에 국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점점 말수가 적어졌고 우울증에 걸려 병원 신세까지 졌다. 최군은 가출해 곧바로 목숨을 끊었고, 몇 달 후 발견됐다.

서울 마포대교의 ‘한번만 더’ 동상. 서울시가 투신자가 많은 마포대교에 자살 예방 목적으로 설치했다. [김경록 기자]

서울 마포대교의 ‘한번만 더’ 동상. 서울시가 투신자가 많은 마포대교에 자살 예방 목적으로 설치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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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공화국’ 한국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우리나라는 2003~2015년 12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5년 한 해 자살 사망자는 1만3513명이다. 보건복지부는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포함하면 1만6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하루에 44명꼴로 평균 33분에 한 명씩 숨지는 셈이다. 자살 시도자는 54만~135만 명으로 추산된다.

국내 자살은 2011년 정점을 찍은 후 조금씩 감소하고 있지만 OECD 1위는 변함이 없다. 2012~2015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이 평균 28.7명으로 2위 헝가리(19.4명)보다 월등히 높다. 특히 노인 자살률(54.8명)은 OECD 평균(18.4명)의 세 배에 달한다. 노인만 유독 높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공적연금 같은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데다 외환위기 이후 효 사상이 급격히 약화됐고, 핵가족화로 인한 고립감, 질병 부담 등이 심해진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살 시도가 많은 서울 시내 한강 다리에 설치된 'SOS 생명의전화'. 자살률이 해마다 조금씩 줄고있지만 여전히 OECD 1위를 지키고 있다. [중앙포토] 

자살 시도가 많은 서울 시내 한강 다리에 설치된 'SOS 생명의전화'. 자살률이 해마다 조금씩 줄고있지만 여전히 OECD 1위를 지키고 있다. [중앙포토] 

최근 증가하는 청소년 자살도 문제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한 초·중·고생은 108명이다. 2015년(93명)보다 16% 늘었다. 지난해 자살을 시도한 학생도 1500명에 이른다.

양두석(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홍보위원장) 안산대 교수는 “▶성공지상주의와 과도한 경쟁 ▶청년실업률 증가 ▶준비 없는 중장년층 퇴직 ▶노인 빈곤과 낮은 건강 수준 ▶가족 해체 ▶유명 연예인 모방 자살 등이 높은 자살률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과도한 업무와 급격한 사회 변화 스트레스도 원인이다. 지난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구청 공무원(30)은 자정을 넘겨 일하는 경우가 일상화됐고 주말 근무도 많았다. 그래서 평소 주변에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하규섭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스트레스가 높아졌지만 제대로 관리를 못한다. 이 때문에 우울증을 비롯해 정신질환을 많이 앓지만 의사 상담을 하거나 치료받는 경우가 22.2%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국내 자살 사망자 수 상위 10곳. [자료: 통계청, 그래픽: 김현민 인턴기자]

국내 자살 사망자 수 상위 10곳. [자료: 통계청, 그래픽: 김현민 인턴기자]

우리나라도 자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11년 자살예방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실효성이 크게 떨어졌다. 예방의 핵심은 관심과 투자다. 2483만원을 투자하면 1명을 살릴 수 있다(영국 보건부 분석). 일본은 지난해 4월 후생노동성에 ‘자살대책추진본부’(본부장 후생노동상)라는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그 밑에 자살대책추진실(11명)을 뒀다. 전국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에도 추진센터가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 직원 두 명이 자살예방 업무와 다른 업무를 병행한다. 또 교육부(학생)·여성가족부(청소년)·국방부(군인)·경찰청 등과 협력도 잘 안 된다. 복지부 전명숙 서기관은 “세월호 유족 관리, 메르스(MERS) 심리 지원, 정신보건법 개정안 시행 등을 처리하고 자살 예방 사업을 챙겨야 한다”며 "현재 인력으로는 다른 부처와 조율하고 그들을 지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올해 복지부의 자살예방 예산은 99억원으로 일본(7508억원)의 1.3%에 불과하다. 일본은 이런 투자 덕분에 자살 사망자가 2006년 3만2155명에서 2015년 2만4025명으로 크게 줄었다.

생명문화 등 자살예방시민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자살률 절반 줄이기'를 100대 국정과제로 채택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생명문화 등 자살예방시민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자살률 절반 줄이기'를 100대 국정과제로 채택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 그동안 선진국의 좋은 정책을 상당수 도입했다. 그러나 실상은 허점투성이다. 자살유해정보 감시사업은 중앙자살예방센터 직원 1명이 담당한다. 지역 자살예방센터(22개)는 지자체 돈으로 운영한다. 응급실에 실려 온 자살 시도자 사례 관리 사업은 42개 병원(한 곳당 인건비 예산 8000만원)만 시행한다. 돈이 없어서 권역응급센터 145개로 확대하는 건 엄두도 못 낸다. 환자 치료비를 지원해 온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지원액을 늘리겠다고 해도 정작 인건비 예산 벽에 막혀 있다.

양두석 교수는 “출산율이 매우 저조한 상황에서 한 명의 생명이라도 보호해야 한다”며 “자살은 감염병과 같다. 메르스처럼 인식해 새 정부 국정과제에 넣어 범국가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직속 자살예방대책위원회 또는 본부 신설 ▶복지부 내 전담조직 설치 ▶직장·학교 예방교육 의무화 ▶민관 협력사업 활성화 ▶언론의 자살보도 준칙 준수 등의 대책을 제안한다.

◆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정종훈·박정렬·백수진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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