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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시진핑과 남은 최후의 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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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국 언론들은 앞다퉈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한테 ‘남북관계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인정해 줬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문재인 옆에서 ‘북한을 위한 인내는 끝났다’ 선언(UPI)” “트럼프가 우방(한국)과 적국(중국)에게 보다 공격적 입장을 취하다(뉴욕타임스)”와 같은 제목을 뽑았다. 회담을 마친 뒤 두 정상의 육성 발언과 공동성명에 적혀 있는 문구를 기초로 기사화한 것이니 누가 맞다 틀렸다를 단정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의 대담한 사드 못 박기 #한·미 정상회담 180도 다른 평가

그렇다 해도 두 나라 언론에서 좀 다른 정도가 아니라 180도 반대되는 분위기가 묻어나는 이유는 뭘까. 두 대통령이 같은 자리에서 서로 다른 얘기만 쏟아내다 마친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마당에 한·미 FTA 재협상이 합의되었는지 같은 기초적인 사실문제까지 쟁점화되니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양국의 합의 내용(공동성명)을 보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마 합의하지 못한 얘기를 하신 것”이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으니 그게 맞을 것이다. 다만 트럼프의 인간성이 규범과 합의보다 막말과 반칙으로 상대방 뒤통수를 치는 스타일인 만큼 한국 정부는 당장 FTA 재협상에 대비하는 게 현명하다.

누가 뭐래도 문 대통령이 잘한 일이 하나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다. 사드는 박근혜 정부 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지만 문 대통령마저 헛발질하면 정상회담의 판이 뒤집힐 만큼 예민하고 감정적인 사안이다. 문 대통령의 방미 직전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현실인식을 제대로 하라”고 한국한테 협박했고, 우리의 집권당 대표는 “사드 배치되면 전쟁 난다”라며 중국 공포심을 공공연히 표출했다. 미국의 하원의원은 “사드 배치가 거부되면 미군은 철수할 수밖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방미 기간에 문 대통령은 작심한 듯 미국 편에 섰다. 미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 “사드 배치를 번복할 것이라는 의구심은 버려 달라. 배치 절차가 너무 늦어질 것이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 대통령의 이 한마디로 사드 배치는 미국인들에게 기정사실화됐다. 그래서일 것이다.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사드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사드 배치는 한국의 주권 사안이다. 한국의 주권적 결정에 대해 중국은 부당하게 간섭하지 마라.” 대통령의 입에서 처음 들어 보는 단호한 대중국 목소리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안보 영역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불확실한 줄타기가 종료됐다. 사드 문제는 큰 시련이 한 번 더 남았다. 문 대통령이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최후의 승부를 벌이는 무대다. 문 대통령은 1주일쯤 뒤 베를린에서 시 주석과 대좌할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진실의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 한국은 원칙을 얘기하든, 실리를 교환하든, 미국의 지원을 받든 사드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고 중국 쪽에 통보해야 한다.

시진핑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중국의 보복은 더 거칠어질 것이다. 국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때 관건은 문 대통령이 정치권과 산업계, 온 국민에게 얼마만큼 호소력있게 일치단결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은 국난을 막아낼 에너지를 거국적으로 모아야 한다. 이 일은 국정 지지율 80%를 오르내리는 문 대통령이 하기에 제격이다. 공격력은 방어력에 반비례한다. 국민의 방어 의지만 일치하면 중국 공격의 날은 튕겨져 나간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