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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워싱턴이 건네는 내분 극복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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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지난 25일 오후 찾은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 광장. 링컨의 거대한 동상이 올려다보이는 이 광장에 두 개의 집회가 열렸다. 한쪽 집회는 반(反)트럼프 성향으로, 난민과 동성애자를 지지하는 50여 명의 무리가 우리 일행을 보더니 “우린 널 사랑해!”라고 외쳤다. 난민도, 동성애자도 아니지만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일요일 오후에 모인 잭 할아버지와 그의 멋진 은발 부인, 22세 페미니스트 남학생과 그가 데려온 반려견까지 모두 활기에 넘쳤다. “인종 차별은 쓰레기통에나 줘 버려” 등의 구호를 보니 지난겨울 서울을 달궜던 집회의 LED 촛불이라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약 100m 뒤. 정확히 반대 성향의 일군의 무리가 “난민은 미국에서 나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 쪽으로 향하려 하자 잭 할아버지는 “나라면 저기론 안 가겠어. 위험해”라고 했다. 하지만 놀라웠던 건 그 반대집회의 질서정연함이었다. 잭은 “쟤들은 나치를 롤모델로 삼아 딱딱한 거야”라고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구호를 조용히 반복할 뿐이었다. 종종 이 두 집회 참가자들이 서로를 향해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외쳤지만, 그들로부터 약 30m 떨어져 상황을 점검하고 있던 경찰이 살짝 미소만 지을 뿐 소동은 없었다. 이 집회를 내려다보는 링컨 동상.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은 편 모습으로 조각됐다. 온화함과 엄격함을 모두 나타내기 위한 장치라고, 우리를 인솔한 국무부 관계자는 설명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1865년의 어느 날, 자기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남군(南軍)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오늘날의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과 같은 리버 퀸호에서 그들을 만나 보복은 없을 것이라 약속했다. 내전 후의 내분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링컨을 이렇게 이끈 이가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재 묵고 있는 블레어하우스의 그 ‘블레어’다. 리버 퀸 회의를 들은 링컨의 지지자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링컨과 블레어의 혜안 덕에 오늘날의 미합중국이 있다.

하지만 내전이 끝났다고 내분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지난 25일의 집회 현장은 말해 준다. 내분 없는 사회는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이상향일 뿐, 내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논쟁은 하되 증오는 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사회라고. 그 성숙을 위해선 위험도 감수하는 지도자가 옵션 아닌 필수라고. <워싱턴에서>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