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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은 참여민주주의 승리” “정치세력 간 타협의 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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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학 석학 슈미터 vs 임혁백 대담

“촛불집회에 의한 정권 교체는 광장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결합한 결과다. 촛불혁명은 참여민주주의의 승리다. 촛불혁명은 동아시아 최초의 명예혁명이다.”(임혁백 교수)

한국 진보학계 대표 임혁백 명예교수 #광장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 결합 #동아시아 최초의 명예혁명 이뤄 #‘양손잡이 민주주의’ 이론가 슈미터 #권력 잡은 건 또 다른 정치세력 #새 유형의 민주주의 만들진 못해

“참여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광장의 시민이 권력을 쫓아냈는가? 권력을 잡은 건 또 다른 정치세력 아닌가? 소수의 권력자가 통치하는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필립 슈미터 교수)

28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회의실에서 촛불집회 이후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임혁백 명예교수(왼쪽)와 필립 슈미터 명예교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8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회의실에서 촛불집회 이후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임혁백 명예교수(왼쪽)와 필립 슈미터 명예교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필립 슈미터 유럽대학연구소 명예교수와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국의 최근 정치 변동을 주제로 논쟁을 벌였다. 슈미터 교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 이론으로 최근 한국에서 새로 조명된 세계 정치학계의 석학이고, 임혁백 교수는 한국의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정치학자다. 두 민주주의 이론가는 사제지간이다. 임 교수가 시카고대 유학 시절 슈미터 교수로부터 7년간 배웠다.

스승과 제자의 대담은 28일 한국정당학회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6·29선언 3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사제가 동시에 참석하면서 이뤄졌다. 학술대회 주제가 6·29선언 이후의 민주화 과정이었던 것처럼 촛불 정국에서 시작한 대담은 87년 체제까지 두루 이어졌다.

▶임혁백=양손잡이 민주주의 얘기부터 하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올해 초 슈미터 선생님의 이론을 토대로 최근 한국의 정치 변동을 해석한 바 있다. 진보와 보수가 타협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연구다(최장집 저서 『양손잡이 민주주의』 참조. 최장집 교수도 슈미터 교수의 시카고대 제자다).

▶슈미터=아! 그랬나? 몰랐다.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는 개별 국가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참정권과 같은 민주주의 원칙은 종교·왕정 등 현실 조건에 따라 다르게 구현됐다. 민주주의 원칙과 현존 민주주의의 타협을 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내가 분석한 이슬람 국가의 민주화 과정에서는 종교나 왕정이 변수였지만 최 교수는 한국의 상황을 이념 문제로 본 것 같다. 모든 민주주의는 타협의 산물이고, 타협은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의사에 따라 달라진다.

▶임혁백=지난해 한국 의회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다. 시민 1700만 명이 거리에 나와 탄핵을 요구했고, 의회가 시민의 요구를 수용했다. 보수정당 의원의 절반 이상이 탄핵 결의에 찬성했다. 광장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는 ‘융합(Heterarchy)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참여민주주의의 승리이자 법치주의의 승리였다.

▶슈미터=민주주의의 이행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경로를 따랐다. 프랑스는 혁명을 일으켰다. 대중이 일어났고 폭력으로 권력을 몰아냈다. 반면에 영국은 지배세력이 대중의 이해를 점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개선 과정을 밟았다. 최근 한국의 정치 변동은 영국의 경로와 유사하다. 말하자면 ‘협약에 의한 민주화 과정(The pacted transition)’이다. 정치권이, 특히 권위주의 체제에 관여한 일부 세력이 민주화로의 이행에 동의해 권력 교체가 이뤄졌다. 참여민주주의의 승리로 보이지 않는다.

▶임혁백=시민이 참여한 결과다. 한국인은 온라인 공간에서 정치세력으로 조직화했고, 광장으로 나갔다.

▶슈미터=한국 상황을 잘 알지 못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 참여민주주의는 국민투표로 새로운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새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규모 군중의 참여가 바로 참여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사례는 정치세력들이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타협한 결과다.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도 인터넷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았다.

▶임혁백=이집트는 실패했지만 한국은 새 정부가 들어섰다. 한국은 성공 사례다.

▶슈미터=새 정부가 들어섰다지만 이전에도 있었던 정치세력이다. 기존 세력 중 다른 세력이 권력을 잡았을 뿐이다.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새 정치세력에 실질적인 변화가 있었나? 한국은 이전과 같은 유형의 세력이 통치하고 있다.

▶임혁백=6·29선언은 야당과 군부가 타협한 결과였다. 선생의 지적처럼 협약에 의한 민주화 과정이었다.

▶슈미터=한국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나라다. 대규모 군중의 참여와 정치세력의 협약이 뒤섞여 있다.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혼합돼 있다.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력의 영향에도 취약하다. 6·29선언 당시 미국의 역할은 예외적이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 정치에 개입할 때 반(反)민주적 방법을 사용했다. 미국은 칠레 피노체트 정부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그런데 30년 전 미국은 한국 군부의 쿠데타를 막았다.

▶임혁백=87년 당시 미국의 외교노선에 변화가 있었다. 레이건 정부는 필리핀의 민주화 과정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지난 30년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협약에 의한 민주주의라고 보는 것인가.

▶슈미터=여기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단언할 순 없다. 대신 베네수엘라 사례를 말하겠다. 베네수엘라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번갈아 가며 통치하고 있다. 정치권의 카르텔이 강력하다. 정치세력 간의 타협에 의한 민주주의는 일시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가 고착화하면 국민은 정치에 흥미를 잃는다. 민주주의는 끝내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잃는다.

▶임혁백=양손잡이 민주주의와 코포라티즘(Corporatism, 노사정 합의제)은 어떤 관계인가.

▶슈미터=민주주의는 작은 체제의 조합이다. 정당정치·노사관계 등 여러 체제 중에서 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유럽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국가가 개입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코포라티즘은 실패했다. 최근에는 금융자본이 산업자본보다 더 세계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변화하고 있다.

▶임혁백=민주주의도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다.

▶슈미터=현존 민주주의는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기술관료주의 와 대중영합주의(Populism)다. 두 경향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기술관료주의는 전문 지식이 있는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다. 국제금융기관·중앙은행·대법원 등 특수한 계층과 집단이 권력을 행사한다. 이 경우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 절차는 장난처럼 된다. 대중이 선출하지 않은 소수가 권력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전문가 집단에 배신당한 대중의 극단적인 선택이 대중영합주의다. 아마추어를 뽑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다.

임혁백

1952년생. 고려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이화여대·고려대 등에서 정치학과 교수 역임. 고려대 정책대학원장, 세계지역학회 부회장 등 역임. 2015년 대한민국학술원상 사회과학 부문 수상.

슈미터

1936년생. 유럽대학연구소(EUI) 명예교수. 미국 시카고대·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과 교수 역임. 2009년 코포라티즘 연구로 정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요한 스키터 상’ 수상.

◆양손잡이(Ambidextrous) 민주주의=필립 슈미터 교수가 2012년 고안한 개념. 현실 상황에 맞춰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민주화 과정.

◆융합(Heterarchy) 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가 혼합한 민주주의.

진행·정리=배영대·손민호 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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