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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머리 묶으셨네요" 10년 만 시력 찾은 환자 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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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처음으로 인공망막 이식 수술을 받은 이화정(왼쪽)씨와 수술을 집도한 서울아산병원 안과 윤영희 교수. [사진 서울아산병원]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공망막 이식 수술을 받은 이화정(왼쪽)씨와 수술을 집도한 서울아산병원 안과 윤영희 교수. [사진 서울아산병원]

"수술 전에는 손으로 일일이 물건을 만져서 구분했어요. 물건의 위치가 바뀌면 못 찾았습니다. 지금은 물건의 형태를 어렴풋이 볼 수 있기 때문에 휴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전병으로 실명했다 극적으로 시력을 일부 회복한 이화정(54·여·서울 동대문구)씨는 29일 통화에서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이씨는 "만지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생활이 바뀌었다"며 "바깥에서 혼자 독립적으로 거동하기가 아직 힘들지만, 집안에서 혼자서 하는 일상생활의 범위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아산병원, 50대 여성 인공망막 수술 성공 #환자 이화정씨, 담당 교수 헤어스타일 알아봐 #"시력판 큰 글씨 보인다…온몸에 전율" #개그맨 이동우 등 1만명 앞볼 길 열려 #수술비 2억원…미국·유럽서 230여 건 시행

이씨는 서울아산병원 안과 윤영희 교수 집도로 지난달 26일 인공망막 이식 수술을 받았고 한 달여 만에 시력을 다소나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수술은 미국·유럽·중동 등지에서 230여 건이 시행됐고 국내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씨의 시력을 앗아간 병은 망막색소변성이라는 유전병이다. 이번 성공으로 국내 환자 1만명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이씨는 수술 직전엔 눈앞의 강한 빛을 희미하게 감지하는 정도였다. 혼자 생활하는 게 불가능해 하루 24시간 남편이 옆에서 도와야 했다. 이랬던 이씨가 앞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지금은 도로에 자동차가 지나가는지, 앞에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됐다. 29일 시력 검사에서 0.03으로 측정됐다.

 "시력판의 큰 글씨를 다시 읽게 됐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우리 딸이 결혼할 때 제가 부축받지 않고 단상 위를 걸어가 화촉을 밝히고 싶어요."
이씨는 29일 서울아산병원 외래 진료를 받으러 와서 "교수님! 머리 묶으셨어요"라고 물어 윤 교수를 놀라게 했다. 이날 윤 교수는 머리를 묶은 채 이씨를 진료했다.

이씨는 태어날 때 시력에 이상이 없었다. 20년 전에 어두운 곳에서 길이 잘 안 보여 망막색소변성 진단을 받았다. 그 이후 점차 주변이 흐릿하게 보이고 시야가 좁아져 2007년 시력을 잃었다. 4000명당 1명꼴로 생기며 국내에선 이 질환 환자가 약 1만명이다. 개그맨으로 활동하다 시력을 잃은 이동우씨가 대표적이다.

개그맨 이동우씨는 개그맨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다 망막색소변성 질환으로 시력을 잃었다. [중앙포토]

개그맨 이동우씨는 개그맨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다 망막색소변성 질환으로 시력을 잃었다. [중앙포토]

 인공망막 수술 원리는 이렇다. 의료진이 환자의 망막에 수신기·칩 등을 이식한다. 환자는 안경과 비슷하게 생긴 장치를 쓴다. 이 장치엔 카메라와 특수 컴퓨터가 달려있다. 이 장치가 인식한 시각 정보가 망막에 이식한 수신기로 보내져 시각 중추로 전달된다. 그럼 환자는 카메라로 촬영된 시각 정보를 인식하게 된다. 윤영희 교수는 "첫 수술이라 5시간 정도가 걸렸다. 27일 두번 째 환자를 수술할 때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됐다"며 "세계적으로 보고된 수술 성공률은 80~90%정도"라고 말했다.

인공망막은 망막 내부에 기기를 이식하고 이를 외부 기기(특수 컴퓨터 등)와 연결해 시각 중추에 정보를 전송하는 원리다. [사진 서울아산병원]

인공망막은 망막 내부에 기기를 이식하고 이를 외부 기기(특수 컴퓨터 등)와 연결해 시각 중추에 정보를 전송하는 원리다. [사진 서울아산병원]

망막색소변성은 망막의 시신경이 손상 돼 실명에까지 이를 수 있는 질병이다. [서울 아산병원]

망막색소변성은 망막의 시신경이 손상 돼 실명에까지 이를 수 있는 질병이다. [서울 아산병원]

 이씨는 앞으로 20여 차례 재활 훈련을 받을 계획이다. 윤 교수는 "재활 훈련을 거쳐 6개월 정도 후면 시력이 완성된다. 사람의 표정을 구분할 정도는 못되더라도 혼자서 일상생활을 할수 있는 정도의 시력으로 회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최대로 회복할 경우 시력을 0.1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화정씨가 인공망막 이식 수술 후 시력을 회복하는 재활 훈련을 받고 있다. [사진 서울아산병원]

이화정씨가 인공망막 이식 수술 후 시력을 회복하는 재활 훈련을 받고 있다. [사진 서울아산병원]

그간 망막색소변성은 국내에서 치료가 불가능했다. 수술을 집도한 윤영희 교수는 "망막색소변성은 시세포가 점차 소멸되는 병이라 약물치료가 안된다. 또 각막처럼 장기 이식을 하기에는 불가능한 신경 조직"이라며 "유전자치료, 줄기세포치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현재까진 인공망막(아르구스2) 이식만 치료법으로 허가가 났다"고 말했다.

이 수술은 약 2억원이 들 정도로 비싼 편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번 수술 비용은 후원을 받아 진행됐다. 이화정씨는 "수술비가 2억원인데 후원이 아니었으면 엄두가 안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망막색소변성 환자들은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에는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제 망막이식 수술이 성공한 만큼 희망을 잃지 말고 병원을 찾아 치료 가능성을 상담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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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 기자 lee.m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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