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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상가야, 쇼핑몰이야 … 손님은 웃지만 상인들 우는 ‘땅밑 분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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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22일 회사원 안모(39)씨는 서울 지하철 3호선 고속터미널역 상가에 있는 ‘노브랜드’(브랜드명을 내세우지 않는 곳) 상품 전문 몰을 찾았다. 그는 “고속터미널역이라고 하면 좀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이미지였는데 최근엔 워낙 좋아져서 지하철을 타지 않을 때도 구경하러 종종 온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작고 허름한 분식집·의류점이 즐비한 곳이었으나 최근엔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 환한 조명, 깔끔하게 정비된 간판이 갖춰져 있다.

낙후 서울 지하철 상가 속속 변신 #대리석 깔리고 세련된 조명·간판 #고속터미널·잠실역 등 4곳 새단장 #상인들 “대기업에만 입찰” 반발

이처럼 서울 시내 ‘지하 세계’가 환골탈태하고 있다. 지하철역 입구에서부터 승강장을 따라 조성된 지하철 상가 얘기다. 5000원짜리 셔츠를 비롯한 저렴한 의류 매장, 분식점, 지하철 이용 고객을 위한 매점 등이 주를 이뤘으나 화장품·의류·패스트푸드 매장으로 들어찬 곳으로 속속 변신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서울에서 고속터미널역·잠실역·노원역·강남구청역 등 네 개 역이 전면 리모델링됐다. 지하철 5·8호선 천호역과 고속터미널역의 7호선 구간 리모델링을 위한 계약도 각각 지난 16일과 9일에 체결됐다.

서울 지하철역의 운영·관리권을 가진 서울교통공사(구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가 통합)는 최근 기존 임차인들과 재계약하지 않고 자본력이 있는 기업에 전체 상가 공간을 임대하고 있다. 계약 기간은 최장 10년이다.

공사 관계자는 지하철 상가의 대대적 변신에 대해 “2008년께부터 지하철 상가의 침체가 두드러졌다. 개별 사업자들이라 매출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가끔 나가보면 중국인 관광객들 외에 손님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하철 상가가 인기를 끌었던 건 젊은이들의 최신 유행을 빠르게 베낀 저렴한 상품들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런 상품들은 온라인으로 산다. 그렇다고 상인들이 고급화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계속 낙후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생존을 위한 변신은 같은 이유로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고속터미널역 상가는 기존 상인들과의 계약이 2013년에 끝났지만 2016년이 돼서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2년 넘게 소송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소송에 참여했던 상인 박모(55)씨는 “대기업이 상가 전체를 관리하며 우리 같은 영세 상점에는 임대를 해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리모델링을 눈앞에 둔 천호역의 기존 임차인들은 “공사가 관리 편의를 위해 대기업에 입찰 편의를 줬다”며 서울시에 감사를 요구하고 있다.

상가 운영을 하고 있는 한 기업체 관계자는 “카페와 의류점, 화장품점 등이 균형 있게 배치될 수 있도록 우리가 상점을 골라서 임대를 한다. 이 과정에서 서비스가 좋은 브랜드 상점에 우선권을 준다”고 말했다. 공사의 관리 범위를 벗어난 공간에서 30년 동안 열쇠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오모(55)씨는 “시민들에겐 당연히 지금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같이 장사하던 사람들이 다 나가서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고 씁쓸해했다.

서울 지하철 상가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지 2년이 지난 1976년부터 생겼다. 81년까지 1호선 지하철역 곳곳에 상가 21개 동이 들어섰다. 지하철 상가의 호황기였던 90년대엔 원래 임차인이 또 다른 임차인에게 단기 임대를 해주는 일도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거액의 권리금도 생겨났다. 하지만 2010년대에 온라인 매장에 밀려 매출이 크게 줄었다.

현재 서울시의 땅밑에서는 ‘권리금 전쟁’도 벌어지고 있다. 서울시가 서울시내 지하도 상가의 2700여 개 상점 임차권 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지하도상가관리 조례 일부 개정 조례안’을 지난 8일 입법 예고하면서다. 지하도 상가는 지하철 상가와 달리 처음부터 상가로 조성한 공간을 말한다. 기존에는 상인들이 임대 계약이 끝난 상점을 서울시 허가 아래 다른 상인에게 넘겨줄 수 있었기 때문에 권리금이 형성됐다. 하지만 조례가 시행되면 계약 기간이 끝난 상점은 무조건 서울시로 반환해야 한다. 서울시는 이를 경쟁입찰에 부친다. 정인대 전국지하도상가상인연합회장은 “수천만원의 권리금을 내고 들어온 소상공인들의 관행을 하루아침에 뒤집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나한 기자 kim.na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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