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도 디테일도 실종된 경제정책 유감

중앙선데이

입력 2017.06.25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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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호 21면

새 정부에 바란다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 와튼스쿨의 아담 그랜트 교수는 개인이 일할 곳을 선택할 때 조직 문화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조직 문화란 그 조직이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고, 고용인에게 무슨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총괄하는 개념이다. 조직 문화의 중요성은 실리콘밸리에서 조직관리 바이블처럼 공유되고 있는 넷플릭스의 매뉴얼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일반적인 기업들은 정직·존중·능력 등 듣기 좋은 덕목들을 사훈에 늘어 놓는데, 사훈을 위배했을 때 어떤 처벌이 따르는지 등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반면 넷플릭스는 매뉴얼을 통해서 회사가 중시하는 9가지 가치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채용·보상·승진에 적용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인사·채용서 상충되는 목표 추구
기본 원칙과 우선 순위 불명확
의도치 않은 부작용 부를 수도
길게 보고 감독 역할에 충실해야

능력, 지역 안배, 차별금지 다 챙길 순 없어

그랜트 교수의 조언이나 넷플릭스의 방침은 행정부나 국가 역시 조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현 정부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 나온 각종 경제정책들은 너무나 많은, 또 종종 서로 상충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문제를 한국사회에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일례로 지난 22일 발표한 공무원 및 공공부문의 블라인드 채용제 및 지역할당 방안은 경제 운영 철학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는 출신 지역, 가정형편 등을 채용시 반영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경제학자로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정부 및 공공부문에서 개인의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면, 이들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정보 (소위 점수·학력·학벌·스펙)들을 채용 시 반영하지 않겠다는 블라인드 채용제도는 이해하기 힘든 정책이다. 또한 이 정책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강조한 능력에 기반한 인사라는 원칙에도 위배된다.

블라인드 채용제와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 신규채용의 30%를 지역인재로 할당한다는 지역할당제 역시 대통령이 강조한 차별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 제도하에서는 능력에 상관없이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구직자들보다 우위에 서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출신 지역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블라인드 채용제의 취지와도 상충된다. 물론 정책에 있어서 상충되는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능력 중심의 인사, 지역 안배, 차별금지 중 무엇이 기본 원칙이고, 다른 원칙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얼마만큼 희생을 각오할지에 대한 경제 운영 철학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독자들 중에는 ‘과연 행정부가 조속히 경제 운영 철학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각 사안에 따라 상황을 봐 가면서 정책을 구체화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 운영 철학의 불명확성은 앞으로 어떠한 정책들이 얼마만큼 도입이 될지 모른다는 심각한 불확실성을 개인과 기업에게 부담시킨다.

최근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정책의 불확실성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예를 들어 미국은 중국이 시장을 개방한 이후 관세상 특혜를 주는 최혜국대우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특혜가 수출입업자에겐 투자 리스크로 작용했다. 최혜국대우 조항은 매년 갱신되기 때문이다. 1년 뒤 관세를 예측할 수 없는 사항에서 수출입업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치긴 쉽지 않다. 오히려 2001년 12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관세율이 확정되자 중국의 대미수출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2005년엔 WTO가입 직전보다 약 2.4배 늘었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발표된 경제  정책은 현장에서 어떠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지, 얼마만큼 정책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달 발표된 육아 휴직 급여 인상을 생각해 보자. 성차별이 만연하고, 차별금지 및 개인 프라이버시 인식이 적은 한국에서 이런 정책은 기업들로 하여금 여성 인력을 적게 채용하게 만들 수 있으며, 채용이 되더라도 심리적 압박을 통해서 육아휴직 사용을 기피하게끔 만드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디테일이 빠진 육아 휴직, 근로시간 단축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한 정책도 유사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법적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인지는 회의적이다. 이미 법정 주당 근무시간은 40시간이지만, 각종 예외 조항과 편법적인 제도 운영으로 실질적인 근무시간은 이미 법적 효과가 미미하다. 현재 법 조항만 제대로 적용되었더라도 최근 보도된 집배원 사망사건이나 게임분야 등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크런치 모드(장기간 집중 근무)’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새 정부는 다양한 정책을 쏟아낼 것이 아니라, 왜 현재 정책이 성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원인을 성찰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가 보이는 열심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지혜가 부족한 열심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조급하게 일자리를 늘리게 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거나,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 혹은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서 각종 정책을 남발하기보다는 여유를 갖고 장기적으로 한국사회의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펀더멘탈 문제에 집중하길 바란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개인과 기업, 즉 민간이 선수이고, 정부는 감독일 뿐이다. 감독은 선수들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그러나 공동체의 목표에 조화가 될 수 있도록 채용·승진·보상 제도를 잘 설계하고 이를 명백히 하면 된다. 새 정부는 과욕이나 단기적 과시욕을 버리고, 유례없이 큰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경제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근본적인 정책을 제시하길 기대한다.

이수형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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