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독] 탄핵 앞두고 사진 보고 그려 … 밝은 듯하면서 어두운 모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토요정담(政談) 청와대에 걸린 박근혜 초상화의 비밀

청와대 본관 1층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 초상화.

청와대 본관 1층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 초상화.

청와대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지난 21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날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에서 열린 일자리위 회의를 취재하러 간 기자들이 카메라에 담으면서다. 역대 대통령 11명 중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가장 왼쪽에 자리했다.

이원희 화백, 1월 초 의뢰받아 #“무의식 속에 비극이 영향 준 듯” #다른 대통령과 달리 면담 못해 #박 전 대통령은 못 보고 떠나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으로 5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지난 3월 10일 물러난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이는 계명대 서양화과 교수 출신의 이원희 화백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윤관·이용훈 전 대법원장, 김재순·이만섭·김수한·박관용·김원기·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도 화폭에 담았다.

이 화백에게 초상화 의뢰가 들어온 건 1월 초였다. 지난해 12월 9일 탄핵소추 가결로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 칩거하고 있는 사이 몇몇 참모가 조용히 퇴임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화백은 YS 때엔 초상화 작업을 위해 한 시간 독대를 포함, YS를 두 번 만났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럴 여건이 안 됐다.

이 화백은 “초상화를 그릴 때는 그 사람의 내면이라든지 특징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잡아내는 게 중요하다”며 “만나서 직접 사진도 찍고 스케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게 생략됐다”고 했다.

대신 공식 사진만 전달됐다. 이 화백이 “다른 자료도 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지만 청와대 관계자는 “‘존영’(尊影) 그대로 그렸으면 좋겠다”고만 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은 “밝은 듯하면서도 어두운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화백은 “어떠한 의도를 갖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사진 자체는 힘이 있을 때의 밝은 모습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비극적인 상황이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화백이 초상화를 완성, 청와대에 인계한 건 3월 20일이었다. 탄핵 결정 열흘 뒤로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지 못한 채 청와대를 떠난 셈이다.

이 화백이 YS에게 초상화를 건넬 때도 아들 현철씨 구속과 외환위기로 청와대가 스산한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한국에서 현직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이 화백을 포함, 6명이다. 이승만·윤보선·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인승 화백, 최규하 전 대통령은 박득순 화백, 전두환·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형모 화백,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형근 화백,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종구 화백이 각각 그렸다.

보통 대통령 초상화가는 ‘문화체육관광부와 미술계의 추천→청와대 참모진의 검토와 보고→대통령의 결정’으로 진행된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이 과정을 밟지 않았다. 이 화백은 박 전 대통령이 2013년 11월 영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을 그린 경험이 있어 참모들이 자신을 선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화백은 “대통령의 그림을 걸어놓는 청와대 공간이 우리나라의 미술 문화를 자랑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며 “대통령 초상화를 임기 초반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힘차고 밝은 모습을 그리자는 취지였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