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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에 맞서는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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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지난 3일 밤(현지시간) 영국 런던브리지와 인근 버러마켓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차량 추돌에 이어 흉기를 휘둘러 7명이 숨지고 48명이 다쳤다. 테러범 세 명이 활개 치는 동안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야 했다.

끔찍한 테러 현장이었지만 TV 뉴스에 포착된 한 사람이 이목을 끌었다. 네티즌이 캡처해 트위터에 올린 사진 속에서 한 남성은 테러범을 피해 달리는 중에도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있다. 버러마켓에서 주말 밤을 즐기다 피하면서도 마시던 맥주가 흐를까 봐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영국인들은 10만여 개의 ‘좋아요’를 달고 수만 번 리트윗했다. 한 시민은 “이슬람국가(IS)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테러가 났지만 이 남성은 맥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과거 나치도 시도했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적었다.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은 맥주로 상징되는 일상을 깨뜨리려 한다. 최근 런던 북부 이슬람사원 인근에서 승합차 추돌 공격으로 무슬림 사상자들이 나오자 한 백인 여성은 “앙갚음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데 공원에 가도 되느냐”고 우려했다. 동시에 무슬림 여성은 “딸이 공격당할까 무서워 출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균열이 현실화되면 극단주의자들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는 걸 아는 시민들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쓴다. 지난달 아리아나 그란데의 맨체스터 공연장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로 22명이 숨졌지만 이후 열린 추모 공연에 또 수천 명이 운집했다. 그란데는 “증오가 이기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고 말했다. 테러 희생자를 위한 밤샘 기도회가 전국에서 열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테러에 맞서는 시민들을 제때 도와주지 못한 것은 타성에 젖은 정부였다. 시리아 등에서 IS가 쇠퇴하면서 훈련받은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대규모 테러는 줄어들었다. 대신 서방 각국에선 차량으로 시민들을 공격하는 테러가 빈발하고 있다. 지난 3월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차량이 인도로 돌진해 한국인 포함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 다리에는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펜스 등이 전혀 없었다. 영국에선 일반 도로에서도 차량으로 행인을 들이받는 공격이 자주 일어나지만 차량의 인도 진입을 막는 볼라드는 찾기 어렵다. 영국 정부는 런던브리지에서 차량 추돌 테러로 시민이 또 목숨을 잃은 뒤에야 부랴부랴 템스강 다리들에 펜스를 만들고 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최근 발생한 24층 임대아파트 화재 현장을 찾고도 피해 가족을 만나지 않아 비난을 샀다. 화재 아파트는 가연성 충전재가 들어간 외장재로 리모델링을 하는 바람에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수년 전부터 화재 규범을 강화하라는 요구를 보수당 정부가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메이 총리가 사퇴 압력에 직면한 것처럼 용감한 시민들은 군림하는 정부를 용납하지 않는다. 정부가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당연하게 여겨 온 소소한 일상마저 흔들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