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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초상화’ 화가 “밝은 모습 그려…(비극적 상황) 무의식 영향 끼쳤을 수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청와대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지난 21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제1차 일자리위원회 회의를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에서 주재하면서 입구에 걸려있는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취재진의 카메라에 담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 초상화도 그린 이원희 화백 #청와대, 존영 하나 건네며 “그대로 그려달라” #“대통령 초상화, 임기 말 아닌 힘있을 때 그려야”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는 역대 대통령 10명과 함께 가장 왼쪽에 걸려 있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으로 5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지난 3월 10일 물러난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는 누가, 언제, 어떻게 그렸을까.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는 계명대 서양화과 교수 출신의 이원희 화백이 그렸다. 이 화백은 이미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윤관ㆍ이용훈 전 대법원장, 김재순ㆍ이만섭ㆍ김수한ㆍ박관용ㆍ김원기ㆍ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의 초상화를 그린 경험이 있다.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 입구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 허진 기자.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 입구에 걸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 허진 기자.

이 화백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건 지난 1월초였다. 지난해 12월 9일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기간이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두문불출하며 청와대 관저에 칩거하고 있는 사이 몇몇 참모들이 조용히 퇴임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화백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상화 작업을 위해선 1시간이나 독대하는 등 두 번이나 직접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직접 만나 초상화를 그릴 여건이 아니었다. 이 화백을 만난 청와대 관계자도 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 것도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또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박 전 대통령의 인물정보를 검색하면 나오는 흔한 사진이었다. 이 화백이 “다른 자료도 주면 안 되느겠느냐”고 했지만 청와대 관계자는 “'존영'(尊影) 그대로 그렸으면 좋겠다”고만 했다고 한다.

이 화백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는 그 사람의 내면이라든지 특징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잡아내는 게 중요하다”며 “만나서 직접 사진도 찍고 스케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게 생략됐다”고 말했다.

이원희(왼쪽) 화백이 지난해 4월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초상화 작업을 위해 만났을 때의 모습 [이원희 화백 페이스북]

이원희(왼쪽) 화백이 지난해 4월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초상화 작업을 위해 만났을 때의 모습 [이원희 화백 페이스북]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은 “밝은 듯 하면서도 어두운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화백은 “어떠한 의도를 갖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사진 자체는 힘이 있을 때의 밝은 모습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비극적인 상황이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탄핵 후 완성했다. 청와대에 작품을 넘긴 날은 지난 3월 20일. 탄핵 결정 열흘 뒤 초상화가 도착한 탓에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지 못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 입구에 걸려 있는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 허진 기자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 입구에 걸려 있는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 허진 기자

역대 대통령들도 자신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를 꼭 기쁜 마음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화백에 따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퇴임 직전 건넬 때도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고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어려워지면서 청와대가 스산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현직에 있는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려본 화가는 이 화백을 포함해 6명밖에 없다.이승만ㆍ윤보선ㆍ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인승 화백, 최규하 전 대통령은 박득순 화백, 전두환ㆍ김대중ㆍ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형모 화백,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형근 화백,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종구 화백이 각각 그렸다.

보통 퇴임할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는 ‘문화체육관광부와 미술계의 추천→청와대 참모진의 검토와 보고→대통령의 결정’으로 진행된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이 과정을 밟지 않았다. 이 화백은 박 전 대통령이 2013년 11월 영국을 국빈방문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을 그린 경험이 있어 참모들이 약식으로 자신을 선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화백은 ‘대통령의 초상화’ 문화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그는 “임기 말에 초상화를 그리거나 초상화를 영정 사진 대용으로 생각하지 말고, 임기 초반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초반의 힘차고 밝은 모습을 그리자는 취지였다. 이 화백은 “대통령의 그림을 걸어놓는 청와대 공간이 우리나라의 미술 문화를 자랑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대통령 초상화의 가격은 얼마일까. 청와대에 걸려 있으니 가격을 매길 수는 없다. 다만 이 화백은 “내 그림값은 시장 가격이 있으니까”라고 말하고 웃었다. 이 화백의 2010년작《누드》는 2015년 7월 추정가가 700만원~2000만원이었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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