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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중요해도 ‘사랑’을 찍어요, 영정사진 봉사 … 취직 급하지만 장애인들 아픔 연극으로 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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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전국서 모인 친구들과 동아리 만든 고교생 김남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르신 장수 사진을 촬영하는 김남규 학생. [구미=프리랜서 공정식]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르신 장수 사진을 촬영하는 김남규 학생. [구미=프리랜서 공정식]

“저 안에 있는 할머니가 누구야? 곱다, 너무 곱다.”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지난 5월 인천 수 요양원에서 본 한 할머니의 들뜬 모습을 김남규(17)군은 잊지 못한다. 영정 사진, 남규군의 표현으로는 ‘장수 사진’을 찍기 위해 한복을 차려입고 화장을 한 할머니는 연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남규군의 손을 쓰다듬으며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경북 구미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남규군은 ‘청소년 장기 프로젝트’라는 봉사 동아리를 이끌고 있다. 혼자 지내는 어르신들의 장수 사진을 촬영해 드리는 게 장기 프로젝트의 주된 일이다.

남규군이 ‘장수 사진’을 생각해낸 건 지난해에 접한 뉴스 덕분이다. “어르신들이 비싼 영정 사진 촬영 비용으로 곤란해한다는 내용의 뉴스였어요. 저런 고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죠.”

뉴스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생전에 찍은 사진이 많지 않았던 할머니였기에 영정 사진으로 쓸 사진을 찾으려고 부모님이 쩔쩔 매셨다. “ 그때 우리 할머니 같은 어르신들을 위한 사진 촬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혼자서 하기엔 벅찬 일이었기에 뜻 맞는 친구들을 모집했다. 고교 1학년 때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활동을 했던 남규군에게는 다행히 전국 각지에 친구가 많았다. 페이스북 등에 공지 글을 올리자 단번에 25명이 모였다. 촬영과 편집, 메이크업 담당까지 역할을 나눈 후 전국 각지 요양원에 전화를 돌렸다. 인천의 요양원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해 와 사진 촬영을 하게 된 게 장기 프로젝트의 첫 활동이 됐다. 그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 100명 중 70명의 사진을 찍었다.

용돈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이라 활동할 예산을 만드는 것도 일이었다. 대구 동성로와 서울 혜화동, 홍익대 앞 같은 번화가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다. 남규군은 사용자제작콘텐트(UCC) 대회 등에서 받은 상금을 아껴 산 캐논 DSLR600만 가지고 모든 촬영을 진행한다. 촬영을 기획하는 모습부터 실제 현장까지의 모습을 캠코더에 꼼꼼히 담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일도 장기 프로젝트의 중요한 업무다.

한창 입시 부담이 가중되는 고등학생들이 모였기에 나름의 원칙도 세웠다. 남규군은 “중간·기말고사 한 달 전부터는 온라인 채팅 회의까지 전면 중단한다”고 말했다. 기숙학교에 다니는 남규군도 오전 8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수업과 자습에 충실히 임한다.

상반기 인천에 이어 10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의 한 요양병원을 찾는다. 남규군의 꿈은 대학을 졸업한 뒤 다큐멘터리 연출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 한국 학생들에게 진짜 봉사활동이 얼마나 벅차고 재미있는 일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점수 1~2점을 받기 위해 하는 스펙용 봉사활동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는 봉사활동의 맛을 다들 알게 됐으면 해요.”

장애인 극단 돕는 연세대 연극동아리 리더 오동하

장애인 문화예술 극단을 돕는 대학생 오동하씨. [최정동 기자]

장애인문화예술 극단을 돕는 대학생 오동하씨. [최정동 기자]

연극 ‘옥상 위를 부탁해’의 주인공 미나는 부모님에게 버려진 채 옥탑방에서 혼자 살아가는 장애인이다. 어느 날 미나의 옥탑방이 있는 옥상으로 축구공이 날아온다. 실수로 공을 너무 높게 찼다가 미나의 집으로 찾으러 온 또래 아이들과 미나는 곧 친구가 된다. 장애와 따돌림, 공부 스트레스 등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우정은 깊어진다.

지난 4월 대학로 소극장에서 열린 이 연극은 연세대 연극 동아리 ‘연인(演人·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이끄는 오동하(25)씨가 기획했다. 연인은 장애인 문화예술 극단인 ‘휠’을 지난해부터 돕고 있다. ‘휠’에서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연극들을 주로 기획한다. 실제 장애인 배우들만 출연한다는 게 특징이다.

오씨가 ‘휠’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해 17년 차 아마추어 배우 박찬영(35)씨를 만난 이후다. 극단에 혹시 도울 일이 있을까 싶어 ‘휠’을 찾아간 오씨를 맞아준 게 박씨였다. 박씨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93년 음주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 45일간 식물인간 상태로 사경을 헤맨 끝에 눈을 뜬 박씨에게는 지체 장애 2급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 때문에 25년이 지난 지금도 박씨의 말투는 어눌하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사고 이후 박씨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었다. 박씨는 오씨에게 “자살까지 생각하게 했던 장애의 아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건 무대 위”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오씨는 휠을 잘 운영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오씨를 비롯해 연인의 회원인 팀원 8명이 공연을 기획하고 공연장 대관과 연출에 필요한 자금 협찬까지 받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극이 바로 ‘옥상 위를 부탁해’다.

준비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장애인 배우들의 공연 준비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발음이 어려운 박씨는 평소 책을 읽을 때에도 눈으로만 읽지 않고 반드시 소리를 낸다. 시력이 아주 낮은 또 다른 배우는 코가 닿을 듯 거울에 딱 붙어 서서 스스로의 표정 연기를 가다듬는다. 돈 나올 곳이 별로 없는 대학생들의 모임이라 재능 기부도 많이 받았다. ‘옥상 위를 부탁해’도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가방 들어주는 아이』 『까칠한 재석이가 달라졌다』 등을 저술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고정욱 성균관대 교수가 무료로 극본을 썼다. 회마다 150만~200만원이 들어가는 대관료와 무대 연출비 등은 팀원들이 공모전에 나가 받은 상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극단 ‘휠’은 다음달 15일 대학로 장애인문화예술센터에서 ‘옥상 위를 부탁해’의 두 번째 공연을 한다. 학업과 공연을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오씨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 장애인 연극을 계속 잘해서 나와 다른 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 학교 공부 이상의 무언가가 쌓이겠죠.”

김나한·서준석 기자 kim.na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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