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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창의·스토리 3大 자본, 베를린을 힙스터 聖地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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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06면

[르포] 크리에이티브 베를린 <1>성공 비밀은

세계 최대 야외 갤러리인 이스트사이드갤러리. [사진 손관승]

세계 최대 야외 갤러리인 이스트사이드갤러리.[사진 손관승]

이방인의 눈에 비친 베를린이라는 이미지는 무뚝뚝하고 딱딱하며 어두웠다. 어깨 위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회색 구름, 냉전의 상징인 회색빛 장벽, 잿빛 건물에 선명히 남아 있는 총알 자국처럼 시민들의 마음에는 상처가 가득 박혀 있었다. 다른 독일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경제 발전으로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15년 전 특파원 근무를 끝내고 귀국할 때까지 내 눈에 비친 베를린의 얼굴은 그러하였다.

독일 통일 27년, 천도 18년 만에 #빈티 나던 베를린이 빈티지 도시로 #전 세계인이 찾는 매력도시 변신 #독일 현대사 압축한 스토리가 자산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산업 전진기지 #인더스트리 4.0 클러스터 급부상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 귀에 들려오는 베를린의 소식은 전혀 달랐다. 요즘 유럽여행의 핫스폿은 단연 베를린이며, 창의적인 젊은 예술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고, 유행을 거부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기 원하는 힙스터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성지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디자인 도시’이기도 하다.

독일서 최고 2.7% 성장률 기록

마르크트 할레9에선 목요일마다 각국의 스트리트푸드장이 선다. [사진 손관승]

마르크트 할레9에선 목요일마다 각국의 스트리트푸드장이 선다. [사진 손관승]

슈프레 강변은 독일 혁신기업의 클러스터. [사진 손관승]

슈프레 강변은 독일 혁신기업의 클러스터. [사진 손관승]

서유럽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빈(貧)티가 줄줄 흐르던 도시 베를린은 이제 매력적인 빈티지로 가득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전 시장은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고 했지만 더는 가난하지도 않다. 통계가 말해 준다. 독일은 지난해 1.9%라는 견고한 성장세를 이룩해 유럽연합(EU)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데, 특히 수도 베를린은 2.7%의 성장률을 보였다. 독일 전체에서도 최고다.

도대체 이 도시에서는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 마법의 비밀을 알기 위해 출장 가방을 내려놓은 곳은 공교롭게도 베르나우어 슈트라세에 있는 베를린 장벽 기념관 옆이었다. 동서 베를린 분단 시절 서쪽 베딩과 동쪽 미테를 가로질러 장벽이 들어섰던 이곳은 더는 세상의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 살벌한 냉전의 잔재였던 장벽은 자유와 예술, 크리에이티브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오픈 갤러리가 되어 있다. 거리 전체가 미술관이고 예술 무대다. 건물의 벽들은 캔버스 역할을 하며, 예술작품들은 실내에 갇혀 있지 않고 시민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미테의 라인하르트 슈트라세에 위치한 ‘벙커’라는 미술관은 뉴베를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다. 나치 때 방공호로 지어졌다가 소련 적군은 포로수용소로 이용했고, 동독 정권은 쿠바에서 수입한 열대 과일 저장소로 사용했다. 통일 직후에는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던 테크노 클럽으로 후끈 달아올랐던 곳이다. 독일 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이곳이 최고의 개인 갤러리로 탈바꿈한 것은 크리스티안 보로스라는 부자가 인수한 뒤부터다. 그는 2008년부터 자신이 수집한 현대미술작품을 공개 전시하고 있는데, 관람하기 위해서는 오래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베를린의 매력을 좀 더 알기 위해 ‘괴테 인스티투트’ 베를린 원장인 가브리엘레 가울러 박사를 만났다. 괴테 인스티투트는 독일어를 가르치고 독일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곳으로 전 세계 98개 나라에 159개 문화원을 두고 있다.

“베를린 괴테 인스티투트에서 지금 교육받고 있는 수강생들은 65개 나라에서 온 650여 명입니다. 젊은이들은 문화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을 좋아합니다. 성장하는 도시에서 성장하고 싶어 합니다. 베를린은 성장하는 곳이니까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과거에 비해 임대료가 많이 올랐다고는 해도 서구의 다른 수도, 그리고 독일 내에서도 뮌헨·프랑크푸르트에 비해 아직도 훨씬 물가가 저렴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인구 350만 명인 베를린은 독일의 정치적 수도의 역할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 도시, 그리고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는 문화 도시라는 얘기다. 그런 특성에 맞게 괴테 인스티투트에서는 방과 후 다양한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저희는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에 초점을 맞춰 프로그램을 짜고 있습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강연과 답사를 합니다. 예술의 도시로서 베를린의 미술관과 박물관, 더 나아가 ‘스트리트 아트’의 현장을 박사급 전문가와 함께 견학합니다. 나치와 분단 등 독일 현대사의 특별한 장소를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세계 최대 야외 갤러리

4 대피소?포로수용소에서 미술관으로 변신한 ‘벙커’ 보로스 컬렉션.

4 대피소?포로수용소에서 미술관으로 변신한 ‘벙커’ 보로스 컬렉션.

5 벙커에 전시 중인 보로스 컬렉션 작품.

5 벙커에 전시 중인 보로스 컬렉션 작품.

크로이츠베르크-프리드리히스하인 구(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해 봤다. 미국·중국·브라질·이집트·러시아·스페인 등 수강생들의 국적과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베를린 한복판을 흐르는 슈프레 강을 따라 각각 동서 베를린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구(區)로 통합된 지역이다. 냉전 시절에는 베를린 장벽에 접해 있어 낙후된 지역이었다.

강변을 따라 세워져 있던 장벽은 이제 1316m에 이르는 그라피티 작품으로 장식한 세계 최대의 야외 갤러리가 되어 자유를 기리는 국제적인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했다. 허름한 건물들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스튜디오가 몰려 있으며 이국적이고 팬시한 레스토랑 거리도 있다.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라이너 예슈케는 이렇게 말한다.

“크로이츠베르크와 프리드리히스하인은 가장 환경 의식이 높은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안 문화도 강하고요. 이 때문에 베를린에서 가장 먼저 녹색당 출신의 구청장이 탄생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은 구글, 유니버설 뮤직, 시스코 창의센터 등 정보기술(IT)과 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산업, 스타트업의 클러스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슈프레 강변은 독일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인더스트리 4.0’의 클러스터였다. 4차 산업혁명 그리고 미래 산업의 소리 없는 전진기지인 것이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독일 최고의 클럽도 바로 이 지역에 있다.

“저는 상하이에서 마케팅을 공부하는 대학생인데, 조만간 이곳으로 터전을 옮길까 합니다. 예술로도 그렇고 비즈니스로도 쿨하니까요. 미래가 보이기도 하고요.”

지역 탐방에 함께 참여한 중국 여대생의 말이었다. IT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여기서 독일어를 배우고 있다는 한 한국 여성은 독일 최고의 스타트업 지원회사인 ‘베타하우스’를 견학한 뒤 이곳의 스타트업에 취업하기로 했다고 한다.

과거의 유산으로 간신히 명성을 지탱해 가는 유럽의 다른 늙은 도시들과 달리 베를린은 도시 전체가 뜨거운 심장처럼 꿈틀거렸다. 한두 개 건물이 아니라 마치 도시 전체가 거대한 재생 프로젝트를 수행 중인 것 같다.
126년 전통 시장 ‘마르크트 할레 9 (Markthalle Neun)’에는 활기가 넘쳤다. 매주 목요일 저녁 각국의 길거리 음식을 파는 이곳은 유명 관광 코스가 됐다. 스페인의 타파스와 터키의 케밥, 인도의 카레, 일본의 오코노미야키, 김치와 버거를 혼합한 김치버거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포장마차 음식 경연장이다. 오후 5시에 열리는데 6시가 넘으면 시장 안은 주민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1년에 한 번은 시장 앞길을 따라 수백m의 식탁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파스타를 함께 먹는 ‘긴 탁자(Lange Tafel)’라는 흥미로운 행사도 열린다. 그냥 식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공동 주제를 놓고 토론하고 대화하는 소통의 자리인데, 주민들은 접시와 포크만 갖고 오면 된다고 한다.

도시의 재생이 과거의 단순한 복원과 회생에 그치지 않고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정신과 함께할 때 발전도 있고 진정한 힘도 갖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공공기관의 일방적 주도가 아니라 주민과 지역 커뮤니티가 함께할 때 도시재생 사업이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재생은 건물의 부활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탄생, 더 나아가 공동체와 인간의 건강한 삶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베를린은 웅변하고 있다.

베를린은 한때 그라운드 제로였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으며 희망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우울과 어두움, 패배의식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독일 통일 27년이 되어 가고 있는 지금, 마치 상처가 아물고 건강한 세포가 다시 살아나듯 베를린은 새롭고 매력적인 얼굴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젊은 에너지로 충만했고 자신감으로 넘쳐 났다.

사람 사이에 인연이 이뤄지려면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바로 그렇다.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신뢰 자본, 그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창의 자본, 그리고 그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 내는 스토리 자본, 이렇게 세 개의 자본이 있어 베를린은 매력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 역경을 뒤집으면 훌륭한 경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베를린이 입증한다. 재도약을 원한다면 다시 부흥하는 도시 베를린의 경험을 꼼꼼히 살펴야 할 이유다.

베를린=손관승 전 iMBC 대표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 특파원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 iMBC 대표이사와 세한대 교수를 지냈으며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그림형제의 길』 등 독일을 무대로 다수의 책을 쓴 저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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