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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여성단체들의 이례적인 차분함...안경환 후보자에 이중잣대 논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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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구절 한 줄 한 줄을 짚어가며 비판 성명을 내는 데 피로감을 느낍니다."

"여성과 술은 보완재" 안경환 후보자에 #여성단체 이례적 침묵 #"이중잣대 오해 살 수도"

국내 대표 여성단체로 평가받는 A단체의 한 간부는 지난 15일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책『남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체의 입장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안 후보자의 책에 실린 “몸을 팔려는 여성이 있고 성적 본능을 제어하기 힘든 사내가 있는 한 매춘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술과 여자는 분리할 수 없는 보완재다” 등의 표현이 논란이 된 며칠 뒤였다. 그는 “‘성욕은 남성의 본능’이란 식의 표현은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라고 비판했지만 단체의 공식 입장을 낼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안 후보자의 여성관 논란은 그가 42년 전 몰래 혼인 신고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점입가경으로 커지고 있다. 혼인 무효 판결과 여성관에 대해 안 후보자는 16일 기자회견에서 사과와 해명을 했다. 이후에도 『남자란 무엇인가』의 구절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회자되고 있다. 댓글 등의 반응은 “이런 사람이 법무부 장관 해도 되나요” 등의 지적이 더 많다.

 여론의 반응에 비해 여성단체가 너무 잠잠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그동안 다양한 여성 관련 이슈에서 여론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30개 회원 단체와 연합한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안 후보자의 책과 관련한 성명 등의 입장은 16일까지 없었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개별 단체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다. 여성민우회 홈페이지에는 지난 15일 대법관 후보자로 추천된 김영혜 변호사에 대해 “인권위 퇴보를 방조한 인물이라 부적절하다”는 성명을 냈다. 앞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지명 이후에는 “여성 후보자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내용의 성명도 발표했다.

 지난 대선 때 '옛 저서의 한 구절'로 비판 세례를 받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사례와도 대비된다. 친구가 여성에게 쓸 '돼지 발정제'를 구했다는 회고록에 A단체를 비롯한 많은 여성단체들은 “즉각 사퇴하라”는 성명서를 쏟아냈다.

 모든 사안과 인물을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안 후보자의 여성관 논란에 여성단체들이 보이는 차분함은 이례적이다. 단체 내부에서는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영등포구에 사무실을 둔 B여성단체의 한 대표는 “남자가 본능적으로 성욕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안 후보자의 인식은 생물학적 결정론인데, 언제든지 차별을 위한 논거로 쓰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식 비판 입장을 낼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그는 “(안 후보자가)책 속에 맥락이 있다고 주장하니 일단 책을 다 읽어야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활동가 중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이 없다"고 설명했다.

 A단체 측에 따르면 여성단체들은 오는 20일 문재인 정부 인사에 대한 개괄적인 입장을 정리하는 간담회를 연다. 단체 관계자는 “간담회 현장과 그 안에서 내려진 결론을 언론에 공개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가장 민감한 이슈인 안 후보자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정리될 지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때문에 일각에서는 시민단체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문재인 정부의 오점에는 대응을 유예해주는 '이중잣대'를 가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탁현민 행정관 등으로 인해 현 정부 인사가 계속 비판을 받다보니 지금은 소위 진보적인 정부에 힘을 모아주는 것이 고위공직자 후보자의 그릇된 여성관을 바로잡는 것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매달 여성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다는 임모(28)씨는 “여혐 문제를 일상적인 논쟁거리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앞장섰던 여성 단체들이 ‘젊은 여자의 몸에선 샘이 솟는다’와 같은 표현에도 침묵하는 것은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김나한 기자 kim.na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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