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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트럼프 시대의 역설 … 여성운동 전초기지 ‘공유 오피스’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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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60년대 이래 가장 활발한 미 여성운동 

“남자가…한 명도 없네요?”

19세기 유행한 여성 클럽 부활 #여성 비하 발언한 트럼프 반대 앞장 #그들만의 커뮤니티 만들어 활동 #연회비 253만원 ‘더윙’ 회원 700명 #꽃꽂이·댄스 배우고 정치 세미나도 #“따뜻한 핑크 누에고치 같은 아지트” #곳곳에서 여성운동 구심점 역할 #헤라허브·라이즈·하이브리 등 인기 #“새로운 종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 뉴욕 시내의 한 평범한 건물. 그러나 꼭대기층에 자리한 공유 오피스 ‘더윙’(The wing)의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핑크빛 소파와 여성 작가의 책이 가득한 책장, 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파스텔톤의 소품들과 초록빛 식물이 들어오는 이를 반긴다. 안쪽에는 파우더룸과 수유실도 갖춰져 있다.

더윙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개된 풍경으로, 짧은 영상에도 그 안온한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뉴욕 기반 매체 빌리지 보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따뜻한 핑크빛 누에고치 같은 아지트.”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여성 전용 공유 오피스로 문을 연 '더윙'. 여성 친화적으로 꾸민 이 공간에서 '더윙' 회원들은 일을 하고, 친목을 다지며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사진 더윙 홈페이지]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여성 전용 공유 오피스로 문을 연 '더윙'. 여성 친화적으로 꾸민 이 공간에서 '더윙' 회원들은 일을 하고, 친목을 다지며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사진 더윙 홈페이지]

더윙 내부. [사진 더윙 홈페이지]

더윙 내부. [사진 더윙 홈페이지]

더윙 파우더룸. [사진 더윙 홈페이지]

더윙 파우더룸. [사진 더윙 홈페이지]

공유 오피스 자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소유가 아닌 공유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퍼지고, 공유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위워크’와 같은 공유 오피스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곳이 특별한 건, 오직 여성만 출입할 수 있는 ‘금남 구역’이라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더윙을 소개하며 “미국에서 여성 전용 공유 오피스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고, 많은 여성이 이런 곳에서 일하며 연대한다”고 보도했다.

FT의 분석대로다. 2011년 샌디에고에서 시작한 ‘헤라 허브’는 5번째 지점을 열 정도로 성장했고, ‘라이즈’(세인트루이스) ‘코우터리’(피츠버그) ‘하이브리’(밀 밸리) ‘리베터’(시애틀) 등이 모두 같은 콘셉트로 인기를 끌고 있다. ‘쉬웍스 컬렉티브’ ‘뉴 위민 스페이스’ 등은 뉴욕에 자리 잡았다.

지난해 10월 문 연 더윙의 성장세는 유독 눈에 띈다. 1년도 안 돼 연회비 2250달러(약 253만원)를 내는 회원 700명을 모았고, 수천 명의 대기자를 확보했다. 사업가ㆍ작가ㆍ엔지니어 등 회원의 면면도 다양하다.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다른 지역에도 곧 지점을 낸다. 그만큼 이런 공간을 열망하는 여성들이 많았단 얘기다.

요즘 미국에선 ‘여성 전용 공유 오피스’가 인기다. 여성들이 모여 각자 일을 하고 함께 공부하며 여러 이벤트도 즐긴다. 최근엔 여성운동의 베이스캠프로도 자리매김했다. 뉴욕에 있는 여성 공유 오피스 ‘더윙’의 내부 풍경. [사진 각 사 홈페이지]

요즘 미국에선 ‘여성 전용 공유 오피스’가 인기다. 여성들이 모여 각자 일을 하고 함께 공부하며 여러 이벤트도 즐긴다. 최근엔 여성운동의 베이스캠프로도 자리매김했다. 뉴욕에 있는 여성 공유 오피스 ‘더윙’의 내부 풍경. [사진 각 사 홈페이지]

“여성들이 여성만의 공동체에 대한 욕구가 있을 것으로 보고 사업을 시작했다”(오드리 겔먼 더윙 공동대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일해야 했을 때 나는 지독히 외로웠고, 같은 고립감을 느끼는 여성이 많을 것이라 믿었다”(조안나 블랙 쉬웍스 대표) 등 설립자들의 혜안은 정확했다.

여성 공유 오피스들의 특징은 단순히 장소를 제공하는 데서 나아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연대의 장을 만들어 여성의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대부분 오피스에선 ‘꽂꽂이’ ‘댄스 레슨’ 같은 가벼운 모임부터 ‘흑인 여성 작가 작품 읽기’ ‘페미니즘 영화 보기’ 등 진중한 프로그램까지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다.

요즘 미국에선 ‘여성 전용 공유 오피스’가 인기다. 여성들이 모여 각자 일을 하고 함께 공부하며 여러 이벤트도 즐긴다. 최근엔 여성운동의 베이스캠프로도 자리매김했다. 뉴욕에 있는 여성 공유 오피스 ‘쉬웍스’의 내부 풍경. [사진 각 사 홈페이지]

요즘 미국에선 ‘여성 전용 공유 오피스’가 인기다. 여성들이 모여 각자 일을 하고 함께 공부하며 여러 이벤트도 즐긴다. 최근엔 여성운동의 베이스캠프로도 자리매김했다. 뉴욕에 있는 여성 공유 오피스 ‘쉬웍스’의 내부 풍경. [사진 각 사 홈페이지]

여성 공유 오피스의 성장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란 정치·사회적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이 공간들이 ‘여성 운동의 전초 기지’로 변모했다.

트럼프가 당선되던 날 ‘힐러리 대통령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 망연자실했던 더윙 멤버들은, 그날 이후 정치 세미나를 더 강화했다. ‘트럼프 충격’을 다루는 심리학자의 강의도 열렸다. 겔먼은 “그가 취임하며 이 공간은 외려 많은 여성에게 ‘꼭 필요한 곳’으로 자리매김했다”며 “매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진 않지만, 회원들이 점점 더 ‘행동(여성 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왜일까. FT는 “여성의 외모를 비하하고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아온 트럼프의 당선 이후 오바마 시절 당연시됐던 권리들이 위협받자, 힐러리를 지지했던 20~30대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연대에 나섰다”고 분석한다.

트럼프 시대에 친 여성 정책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심증’을 뒷받침하는  ‘물증’이 될만한 사건도 터졌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낙태를 돕는 비영리 병원 등에 대한 지원을 멈추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한 것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폐기한 ‘낙태 반대 정책’을 되살려낸 것이었다.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열린 반트럼프 시위 '여성 행진'에는 마돈나 등 톱스타들도 참여했다. [AP=연합뉴스]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열린 반트럼프 시위 '여성 행진'에는 마돈나 등 톱스타들도 참여했다. [AP=연합뉴스]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열린 반트럼프 시위 '여성 행진'. [AP=연합뉴스]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열린 반트럼프 시위 '여성 행진'. [AP=연합뉴스]

카렌 블레어 센트럴 워싱턴 대학 교수는 “여성 운동은 특정 시기에 더욱 격렬해지곤 하는데, 바로 지금”이라며 “요즘 여성 운동은 1960년대 이래 가장 활발하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도 “주춤했던 여성 운동이 힐러리 패배 후 오히려 다시 돌아왔다”며 “지난 1월 워싱턴에서 진행된 반트럼프 시위 ‘여성 행진’은 1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전국에서 작은 그룹의 형태로 지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성 공유 오피스는 이처럼 여성 운동을 일상에서 지속하기에 안성맞춤의 베이스캠프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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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해 생활 속을 파고드는 여성 연대가 마치 19세기 미국 전역에 출현했던 ‘여성 클럽’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빌리지 보이스는 “19세기 여성의 피난처였던 ‘여성 클럽’이 트럼프 시대에 ‘공유 오피스’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더윙 공동대표인 겔먼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달아올랐던 여성 클럽을 모델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른 점이라면, ‘21세기 여성 클럽’은 자신들만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연회비로 운영되는 등 자본주의를 기반으로”(빌리지 보이스) 움직인단 점이다.

‘21세기 여성 클럽’의 미래는 밝아보인다. 여성 공유 오피스에 투자하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어서다. “트럼프 시대 여성 친화적 기업으로 인식되는 것은 현명한 일”(스콧 갤러웨이 뉴욕대 교수)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페미니즘의 부흥으로 ‘여성 전용 오피스’는 이 업계의 틈새 시장이 됐다”고 분석했다.

[S BOX] 여성 클럽, 1920년대 여성 참정권 얻었을 때 가장 활기

‘여성 클럽 운동’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미국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었던 여성운동이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었던 것은 물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기 힘든 때였다.

최초의 여성 클럽으로는, 1868년 언론인 제인 크롤리가 만든 ‘소로시스’가 꼽힌다. 당시 크롤리는 뉴욕 프레스 클럽에서 찰스 디킨스와 함께하는 만찬에 참석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여성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분노한 그가 꾸린 모임이 바로 ‘소로시스’였다.

이후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교육 수준도 높았던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클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 활동을 할 수 없는 답답함을, 클럽을 통해 해소했다.

클럽 운동의 초창기에는 급진적인 정치 활동보다,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빈곤층을 위한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다 점점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수 천 개에 이르게 된 여성 클럽은, 여성의 권리뿐 아니라 아동·노동·환경 등 사회 여러 문제에 직접 목소리를 내며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1920년 여성이 참정권을 얻었을 때다. 70년대 다시 한 번 부활했던 여성 클럽 운동은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이 급격히 증가하며 점차 소멸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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