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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옥자' 탄생 비화 7

중앙일보

입력

영화 '옥자'

영화 '옥자'

지금 세계 영화계를뜨겁게 달구고 있는 단 하나의 화두,봉준호 감독의 ‘옥자’(6월 29일 개봉)를 만나기 전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담았다.

 '옥자'의 탄생

 봉준호 감독이 옥자를 처음 ‘만난’ 건 2011년, 서울에서 ‘설국열차’(2013) 프리 프로덕션을 하던 때였다. “아주 비일상적으로 흥미롭게 생긴 동물이 거리에 있는 걸 봤다. 그건 크고, 매우 수줍고, 내성적으로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설국열차’는 기상이변으로 얼어붙은 지구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을 태운 채 끝없이 달리는 기차 속 음울한 사투를 그린 영화. 바퀴벌레로 만든 보급품조차 모자라 굶주리는 ‘꼬리칸’ 약자들과 달리, 권력을 틀어쥔 극소수 상류층은 값비싼 음식을 흥청망청 소비한다.

옥자는 어쩌면 이들 사이에 거래되던 보급품에 해당하는 존재다. 다수의 대중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 식량이오, 가진 자들에겐 대중을 쥐락펴락할 유용한 도구이자 상품 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아이가 이 ‘상품’을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본다면, 그 존재를 사랑한다면 어떨까. “‘옥자’는 내가 아이의 관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한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말이다.

그가 연필로 손수 스케치한 옥자와 미자 그림을 2013년 ‘설국열차’ 개봉에 맞춰 내한한 틸다 스윈튼에게 보여주면서 ‘옥자’ 프로젝트는 궤도에 올랐다. 할리우드 안팎에서 출연진과 스태프를 꾸리며 10개월 만에 첫 시나리오를 탈고한 것이 2015년의 일. 오랫동안 봉준호 감독에게 눈독 들여온 브래드 피트의 영화사 플랜B가 제작에 나섰고, 플랜B와 브래드 피트 주연 자사 오리지널 영화 ‘워머신’(데이비드 미쇼 감독)을 제작하고 있던 넷플릭스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기로 하면서 ‘옥자’는 마침내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했다.

기이한 에너지가 넘치는 암흑동화

‘옥자’의 세계관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꽤 신랄하다. ‘옥자’에서 루시 미란도는 옥자와 미자를 요란한 퍼레이드 카트에 태운 채 섬뜩할 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슈퍼돼지 살코기로 만든 “죽이는 맛”의 소시지를 뉴욕 시민들에게 던져준다. 동물학자 윌콕스는 24시간 생방송을 찍듯 과장된 말투와 제스처로 스스로를 혹사하며 비관적인 알코올(정확히는 소주) 중독자가 되어간다(봉준호 감독은 제이크 질렌할에게 기타에서 가장 높은 음보다 더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를 주문했다고).

봉준호 감독이 쓴 시나리오에서 캐릭터 디테일과 영어 대사의 날을 세운 건 각본가 존 론슨이다. 그는 블랙 코미디 ‘프랭크’(2014,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 ‘초[민망한]능력자들’(2009, 그랜트 헤스로브 감독) 등에서 신랄한 대사들을 맛깔나게 써낸 저널리스트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다. 대자본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자본주의를 이토록 노골적이고 과격하게 풍자한 사례도 드물다. 그 때문에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이 투자에 난색을 표했다고 봉준호 감독은 털어놨다. 그가 넷플릭스와 손잡은 결정적인 이유도 “감독의 편집권을 전적으로 존중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 ‘설국열차’ 북미 개봉 당시 그는 배급사 와인스타인 컴퍼니에게 영화를 20분 가까이 편집 당하는 수난을 겪은 적도 있다. 한계를 모르는 자본가들의 탐욕을 반영한 것일까. 영화 곳곳에서 예민하게 신경을 긁는 과잉의 에너지들은 ‘옥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배두나, 고아성 그리고 안서현

영화 '옥자'

영화 '옥자'

ALF가 조력자로 나선 이후에도 옥자를 구하려는 미자의 노력은 번번이 좌절된다. 그럼에도 어린 미자는 포기를 모르고 자본주의가 휘황찬란한 부(富)의 장막 뒤에 감춘 추악한 현실로 돌진한다. 그곳에는 어떤 관객들을 채식주의자의 길로 이끌 만큼 애처롭고 잔혹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표현처럼 “산짐승 같은 기세”로 미란도의 거대한 권세에 맞서는 미자의 모습은 히어로 액션 영화 ‘로건’(3월 1일 개봉,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괴력의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연상될 정도다. 신예 안서현이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됐다.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때는 미자를 누가 연기하면 좋을지 몰랐다”는 봉준호 감독은 스릴러 영화 ‘몬스터’(2014, 황인호 감독)에서 살인자에게 쫓기면서도 똑 부러지는 소녀로 분한 안서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동그란 얼굴형과 큰 눈, 누군가를 끝까지 책임지려 하는 야무진 표정은 ‘플란다스의 개’(2000)의 배두나, ‘괴물’(2006)의 고아성 등 봉준호 영화 속 여성 배우들의 계보를 잇는 듯한 인상도 준다.

산골소녀 미자 뉴욕에 가다

영화 '옥자'

영화 '옥자'

‘강원도 산골에서 시작해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끝나는 와일드한 모험’은 봉준호 감독이 ‘옥자’ 첫 구상 때부터 염두에 둔 콘셉트다. “가난한 시골 아이가 자본주의의 심장부라고 하는 맨해튼 월스트리트 근처까지 간다. 영화를 준비하며 유사한 여정을 다룬 ‘스미스 씨 워싱톤에 가다’(1939, 프랭크 카프라 감독)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2001~2003, 피터 잭슨 감독)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의 말이다. ‘설국열차’에서 송강호의 질박한 한국식 대사 톤과 마블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반스 등 할리우드 배우들의 장르적인 연기를 조합해 낯선 분위기를 자아냈던 봉준호 감독. ‘옥자’에서는 그러한 시도를 더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영화 초반부, 허름한 강원도 시골 농가에 제이크 질렌할이 미국 TV 쇼에서나 볼 법한 호들갑스러운 ‘할리우드 액션’을 구사하며 등장했을 때는 살짝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정도다. 틸다 스윈튼이 서구식으로 재해석한 샤넬 한복을 입은 채 뉴욕 퍼레이드에 나서고, 폴 다노와 릴리 콜린스, 스티븐 연이 오색빛깔 우산을 휘두르며 서울 지하상가를 종횡무진하는 액션 신은 또 어떻고. 애초 ‘옥자’ 같은 고색창연한 이름의 동물이 맨해튼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과 연관 있다는 것 자체가 허를 찌른다. “같은 이름을 가진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가장 촌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안 어울리는 것의 조합에 끌린다.” 이 얘기를 하며 봉준호 감독이 가장 즐거워 보였다는 사실을 귀띔한다.

한국과 뉴욕,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로케이션 수천여 곳에서 진행된 촬영은 지난해 8월 29일까지 총 79일간 이어졌다. 최두호 프로듀서에 따르면, 한국에선 한 번도 촬영된 적 없는 장소를 찾기 위해 드론과 구글맵을 총동원했다고.

CG와 특수효과

현실에 없는 수퍼돼지 옥자를 영화 속에 구현하기 위해 봉준호 감독은 ‘괴물’의 괴물을 함께 작업한 장희철 디자이너와 100장 넘는 스케치를 거친 끝에 옥자의 밑그림을 얻었다. 네덜란드 출신 시각효과 전문가 에릭 얀 드 보어가 CG를 통해 옥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2m 40㎝의 키, 몸길이만 4m에 가까운 덩치. 여기에, 실제 돼지와 하마들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가미했다. 미자와 교감하는 장면에선 반려 돼지들을 참고했다. 봉준호 감독은 에릭 얀 드 보어의 위트 있는 관찰력이 옥자의 매력을 밀어 올렸다고 회상했다. 특히 옥자가 꼬리를 털며 대변을 방사하는(!) 장면은 에릭 얀 드 보어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들려준 하마의 배변 방식에서 착안한 것.

촬영장에서는 소품 인형이 옥자 역할을 대신했다. 옥자가 온몸으로 활약하는 정교한 장면에선 네 개의 부분으로 분리되는 ‘허그 리그(Hug Rig)’라는 촬영 장비를 동원해, 이를 두 명의 오퍼레이터가 조정했다. 안서현은 “친오빠가 푸근하고 나랑 소통을 잘한다는 측면에서 옥자와 닮았다”면서 “우리 집 강아지 ‘랑이’와 오빠의 느낌을 떠올리며 연기했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이 처음 풀 CG 캐릭터를 시도한 ‘괴물’ 연상 장면을 찾는 것도 ‘옥자’를 보는 재미다. 옥자가 지하상가에서 정신없이 쫓기는 장면은 ‘괴물’에서 괴물이 한강 고수부지에 출몰해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하는 장면과 꼭 닮았다.

영화 '옥자'

영화 '옥자'

한 대의 카메라 그리고 필름

흔히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달리 봉준호 감독은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닐 경우 단 한 대의 카메라를 고수했다. 지금껏 그가 해온 방식대로. 이번 영화에서 그는 데이비드 핀처, 우디 앨런 등 작가주의 감독들과 호흡을 맞춰온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와 처음 작업했는데, ‘옥자’가 넷플릭스 영화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은 “그간 해온 것과 같이, 순수하게 영화적인 완성도의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했다.

‘옥자’에 있어 그에게 아쉬움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35㎜ 필름으로 찍지 못했다는 것. “‘옥자’를 준비하던 시기에 이미 한국에 있는 모든 현상소가 문을 닫았다. 마지막 남은 현상 설비가 한국영상자료원으로 들어갔는데, 두 시간짜리 장편영화 분량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고민 끝에 촬영감독 다리우스가 ‘필름보다 더 필름 같은 디지털 카메라를 가져와보겠다’고 했고 우리는 알렉사65라는 디지털 카메라로 돌파구를 찾았다.”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에 따르면 ‘옥자’는 알렉사65 카메라에 빈티지한 화면 효과를 주는 70㎜ 파나비전 렌즈를 장착해 찍었는데 “덕분에 원했던 만큼의 필름에 가까운 룩(Look)을 구현해냈다”고. “극장 스크린에서 아름답게 보이도록 찍힌 영화가 작은 화면으로 옮겨졌을 때도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옥자’를 둘러싼 무수한 논란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다. 영화는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그 판단은 이제 관객의 몫에 달렸다.

틸다 스윈튼과 드림 캐스팅

‘옥자’의 캐스팅은 한국과 할리우드의 노련한 배우들을 모았다는 사실만큼이나 그들에게서 색다른 면모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그런데 그게 새삼스레 어울린다. 평소 배우들을 지켜봐온 봉준호 감독의 관찰력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설국열차’에서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등극한 틸다 스윈튼은 ‘옥자’에서 출연과 함께 제작에도 참여했다. 영화에선 자본주의의 위선적인 두 얼굴을 연기했지만, 이는 반전 캐스팅. 실제로는 집에서 개 다섯 마리와 열 마리 이상의 닭을 키우는 동물 애호가라고. 제이크 질렌할은 의외로 봉준호 감독과 오래된 사이다. “‘도니 다코’(2001, 리차드 켈리 감독)에 출연하고 얼마 안 돼서 봉준호 감독을 처음 알고 이후 종종 만났는데, ‘옥자’ 얘길 듣고 내가 먼저 무조건 출연시켜달라고 했다”고 했다. 그의 눈빛에서 상처 받기 쉬운 연약함을 발견했다는 봉준호 감독은 ‘옥자’에서 이를 십분 활용했다.

‘살인의 추억’(2003)을 보고 봉준호 감독의 팬이 됐다는 폴 다노는 ‘설국열차’에 출연할 뻔했지만 스케줄 문제로 무산, 역할이 제이미 벨에게 돌아가자 다음 기회를 오매불망 기다렸다가 ‘옥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강하고 신사적인 캐릭터를 꿰찼다. 미국 AMC 방송의 좀비 재난 시리즈 ‘워킹 데드’(2010~)와 여러 인디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의 눈에 띈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븐 연은 ‘옥자’에서 미자와 ALF 멤버들의 통역을 담당하며 결정적인 키를 쥔 인물로 등장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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