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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비틀거릴 때, 마르크스는 다시 깨어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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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마르크스 『자본』출간 150년 

지난달 영국 의회에서 마르크스를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졌다. 의회에서 정치사상가를 언급하지 않는 관행을 깨고 노동당의 존 맥도널 의원이 “『자본』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발언해서다. 노동당 당수인 제러미 코빈도 마르크스를 “위대한 경제학자”라고 칭했다. 이에 보수당은 “노동당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영국을 초국가적인 실험대상으로 바꿀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8일(현지시간) 조기 총선 결과 보수당의 과반 의석은 깨졌고 노동당은 40%의 득표율을 올리며 의석을 262석으로 늘렸다.

150년 전 예언한 독점·부의 불평등 #21세기 세상에서도 현재진행형 #지난 영국 총선 때 코빈 노동당수 #“마르크스는 위대한 경제학자” 밝혀 #엔지니어의 두뇌, 경영자의 능력 #인적자본의 힘 빠뜨린 건 책의 한계

BBC “지난 천년 가장 큰 영향력 끼친 책”

『자본』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

『자본』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

올해는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원제: Das Kapital)을 출간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1867년 9월 14일 노동 계급의 ‘성경’으로 불리는 『자본』 1권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간됐다. 『자본』 1권의 초판 1000부가 소진되는 데 5년이나 걸렸지만 이 책은 20세기를 뒤흔든 사회주의 열풍의 사상적 토대가 됐다. 세기말인 1999년 영국 BBC 설문조사에서 지난 천년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으로 『자본』이 선정됐고, 2005년 BBC 설문조사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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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9월 14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간된 『자본』 초판본. 초판 1000부가 다 팔리는 데 5년이 걸렸다. [중앙포토]

1867년 9월 14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간된 『자본』초판본. 초판 1000부가 다 팔리는 데 5년이 걸렸다. [중앙포토]

마르크스와 『자본』은 한국에서도 꾸준히 관심을 받아 왔다. 1980년대 같은 ‘뜨거운 관심’은 아니지만 정례적인 행사도 열린다. 지난달 13일 성공회대에서 열린 ‘맑스 코뮤날레’가 대표적이다. 올해 8회째를 맞는 이 행사에는 30여 개 연구단체와 비정부기구(NGO)·정치조직 관계자, 개인 등 연인원 120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자본』을 뒤틀린 자본주의를 바로 보는 지침서라고 평했다.

『자본』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로버트 L 하일브로너는 『세속의 철학자들(Worldly Philosophers)』에서 “이윤은 어떻게 떨어지는지, 자본가들은 어떻게 새로운 기계를 추구했는지, 각각의 호황은 어떻게 파국으로 끝나 버렸는지, 중소기업들은 위기 때마다 어떻게 대기업에 흡수되었는지 등의 경향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운동법칙(laws of motion)’이라 불렀다. …이러한 예언 가운데 상당수는 현실로 나타났다”고 썼다.

영국 산업혁명 당시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 [중앙포토]

영국 산업혁명 당시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중앙포토]

이런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은 19세기의 ‘우울한 발견’이지만 21세기 한국에서도 들어맞는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아르바이트생이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떠도는 청년들, 저녁과 휴일이 없는 삶을 사는 직장인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소득 5분위 배율에서 가장 낮은 1분위의 소득은 2016년 전년 대비 5.6% 급감한 데 비해 가장 높은 5분위 소득은 2.1% 늘었다. 소득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뜻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국세청에 따르면 자산이 5000억원이 넘는 국내 대기업은 2016년 1282개로 전체 법인의 0.2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나머지 59만 개 법인보다 많은 107조6692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국내 10대 대기업 사내유보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724조7894억원에 달한다. 1년 새 50조원 이상 증가했다.

1929년 미국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은 목에 피켓까지 걸고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중앙포토]

1929년 미국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은 목에 피켓까지 걸고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중앙포토]

불평등과 부의 집중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의 투자은행들은 역대 최고 수준의 실적을 올리고 있고 최고경영자(CEO)들의 막대한 연봉은 여전하다. 모건스탠리의 CEO 제임스 고먼은 2250만 달러(약 252억원), 골드만삭스의 CEO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2200만 달러를 받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부가 부실 금융회사를 국유화하고, 세 차례의 양적완화(QE)와 초저금리정책을 단행한 덕분이다. 파리경제대학 교수인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인구가 줄거나 정체되면 앞서 축적돼 있던 자본의 힘이 증가하며,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기존 부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고 봤다. 이 경우 부유층 안에서도 부가 분산되지 않고 집중돼 불평등이 고착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계급의 절대적 삶의 질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됐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과 노동의 소외 현상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자본의 집중은 정보기술(IT) 등 첨단 산업일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구글이 운영하는 웹브라우저인 크롬의 점유율은 전 세계적으로 56%에 달한다. 페이스북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모바일 트래픽 점유율은 77%, 아마존닷컴의 미국 내 온라인 유통 매출은 43%에 달한다.

1987년 10월 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 1면. 다우지수가 22.6% 폭락한 ‘블랙먼데이’를 보도했다. [중앙포토]

1987년 10월 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 1면. 다우지수가 22.6% 폭락한 ‘블랙먼데이’를 보도했다. [중앙포토]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은퇴한 정치인들이 기업에 들어가 로비스트로 활동하며 큰돈을 벌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재무장관이었던 조지 오스본은 세계 최대의 펀드운용사 블랙록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연간 84만 달러(약 9억4000만원)를 벌고 있다. 또 런던의 신문사인 ‘이브닝 스탠더드’에서 수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현대 정치에는 지대 추구 행위(rent seeking·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로비 등 비생산적 활동)가 만연해 있다”며 “정치인들은 은퇴할 때 밀렵꾼으로 변신해 로비 활동으로 돈을 번다”고 비판했다.

2011년 9월 26일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나선 미국 시민들. [AP=연합뉴스]

2011년 9월 26일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나선 미국 시민들.[AP=연합뉴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양학부 교수는 “미국 기업의 모럴해저드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했고 정치권력과 공적자금으로 금융 회사들을 구제했다”며 “파생상품이 너무 거대해져 버려 실물경제로 돈이 흘러가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현재 미국의 경제정책을 장악하고 있는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스티븐 므누신 재무부 장관,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 윌버 로스 상무부 장관 등도 모두 월가 출신이다.

자본주의 내 새로운 분배 논의로 이어져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 [중앙포토]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 [중앙포토]

물론 마르크스가 놓친 것도 많다. 경제 저술가 토드 부크홀츠는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에서 “상상력·독창성·경영능력과 같은 것들을 마르크스가 빠뜨렸다”며 “이윤증대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이나 경영과 같은 인적 자본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엔지니어의 두뇌와 대담한 투자를 위한 경영자의 용기 같은 것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본』은 자본주의가 비틀거릴 때마다 관심의 대상이 됐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조정자본주의·혼합자본주의 등의 새로운 분배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며 “저소득층이 주로 주장하던 기본소득도 최근 유럽 선진국과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일자리가 흔들리고 불황이 닥칠 때마다 『자본』은 유령처럼 자본주의의 주변을 배회할 것 같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자세한 내용은 이코노미스트 1388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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