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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키우듯 아이돌 키워” … 연습생 사진 67만원 거래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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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호 15면

나만의 ‘프린스 메이커’에 열광하는 2030

지하철 2호선 신촌역 출입구에 전시된 아이돌 연습생 광고 앞에서 팬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출입구에 전시된 아이돌 연습생 광고 앞에서 팬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직장인 김모(29)씨는 매일 밤 12시가 되면 습관처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한다.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2’(이하 프듀101)에 출연 중인 강다니엘 연습생에게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듀101은 101명의 아이돌 연습생 중 11명을 시청자 투표로 뽑아 데뷔시키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투표 기회가 하루에 한 번뿐이라 남동생과 부모님 명의 계정까지 투표에 동원하는 편법도 쓴다.  집 안에 있는 컴퓨터엔 강다니엘 연습생의 개인 영상을 하루 종일 스트리밍해 놓는다.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서다.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엔 새로 만든 ‘짤방(짧게 편집한 동영상)’을 올린다. 김씨는 “내 아이돌이니 내가 영업을 뛰는 게 당연하다. 퇴근할 땐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 들러 강다니엘 광고판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곤 한다”고 말했다.

내가 점찍은 아이돌 데뷔 위해 #‘프로듀스 101’ 자정마다 투표 전쟁 #자체제작 캐릭터 인형 3만~4만원 #스타가 키워줘야 할 대상으로 #과도한 간섭 ‘갑질’로 이어지기도

아이돌을 대하는 팬들의 문화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스타를 구름 위 존재처럼 섬기던 팬들이 이제는 직접 내 손으로 스타를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과거 ‘오빠부대’로 대표되는 수동적 팬 문화가 연예인을 우상화했다면 지금은 자신이 책임감을 가지고 키워 주고 지켜 줘야 할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얘기다.

직접 찍은 아이돌 사진을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거래하는 익명의 트위터 계정. 정서영 인턴기자

직접 찍은 아이돌 사진을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거래하는 익명의 트위터 계정. 정서영 인턴기자

팬들은 나의 스타를 키우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프듀101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프로그램 공연 현장에서 몰래 찍은 대포사진(멀리 있는 피사체도 찍을 수 있는 대포 모양의 망원렌즈를 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트위터 등 SNS에서 직거래로 고액에 거래된다. 최근엔 김종현 연습생의 대포사진이 67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직장인 이보롬(32)씨는 “잘 나온 사진 한 장은 팬덤 형성에 결정적이다. 사진이 팔리는 가격은 그 연습생의 인기도를 말해 주기 때문에 팬들은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이를 구매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광고에도 팬들의 지갑은 열린다. 윤지성 연습생 팬들은 트위터에 후원용 계좌번호를 올려 700만원가량의 후원금을 모으기도 했다. 모금액은 지하철 광고, 현수막 같은 응원도구 제작에 쓰였다.

과거 ‘오빠부대’의 업그레이드 버전

기성 아이돌 팬 사이에서도 이 같은 문화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이돌이 방송에서 선보인 캐릭터를 밑밥 삼아 2차 콘텐트를 생산하는 일은 흔하다. 화면 속 아이돌 멤버의 성격을 바탕으로 캐릭터에 어울리는 서사를 덧붙여 나가는 방식이다. 엑소(EXO) 팬들은 각 멤버의 특징을 담은 ‘백쿠(백현)’ ‘곰인이(카이)’ ‘밍구리(시우민)’의 캐릭터 인형을 주문 제작한 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3만~4만원가량을 받고 판매했다. 또 이 인형과 함께 여행을 다니거나 인형에 여러 가지 옷을 갈아입힌 다음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 세븐틴·빅스 등 다른 아이돌 팬들도 오로지 아이돌만을 주제로 하는 굿즈 판매전·사진전·영상회를 연다. 직장인 최성인(29)씨는 “본방송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아이돌의 매력을 2차 콘텐트를 만들고 소비하다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아이돌 ‘덕질’이 공주를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 컴퓨터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디지털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임 ‘다마고치’가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고 본다. 청소년 시기 디지털 화면 속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키우는 데 열광했던 세대가 2030이 되면서 실사판 ‘프린스 메이커’를 게임처럼 즐긴다는 얘기다. 이들은 ‘내 새끼는 내가 키운다’는 주인의식을 갖고 아이돌을 대하고,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김봉석 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일방적으로 스타가 마케팅 차원에서 던져 주는 것만 소비했다면 요즘 팬들은 내가 직접 키워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아이돌과 팬이 함께 성장하며 충성도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이돌도 신비주의 벗고 친근하게 변해

프로듀스101에 출연 중인 강다니엘 연습생과 팬들이 패러디한 캐릭터 야망어피치.

프로듀스101에 출연 중인 강다니엘 연습생과 팬들이 패러디한 캐릭터 야망어피치.

이 같은 팬 문화에 맞춰 아이돌도 점점 친근하게 변하고 있다. 신비주의를 일삼던 20세기와는 다르게 21세기에는 팬들과 눈을 직접 맞추거나 낮은 자세로 임하며 소통한다. 방탄소년단의 무대 아래 모습을 담은 SNS 속 일상 사진은 무대 영상만큼의 인기를 누린다. 웬만한 아이돌그룹은 자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직접 요리를 해 먹는 모습 등 과거엔 방송되지 않았던 부분에 카메라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엠티(MT)라도 가게 되면 서로에 대한 얘기를 남기는 롤링페이퍼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대학생 한수정(25)씨는 “겸손하고 조신한 성격의 남자 아이돌들 모습이 예전처럼 가부장적인 남성성을 과시하는 스타들보다 매력적”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권력의 전복이 팬들의 ‘갑질’로까지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팬이 ‘내가 키웠으니 나도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돌이 연애를 하거나 외모 관리를 안 했을 때 충고를 빌미로 ‘파양하겠다’ ‘괜히 좋아했다’ 등의 비난을 쏟아내는 것도 팬들이다. 엑소의 멤버 첸이 올 초 열애설에 휩싸였을 때 팬들은 SNS를 샅샅이 뒤져 사진 속 반지가 커플용이라는 증거를 찾아낸 뒤 상대 여성에게 욕설을 쏟아내기도 했다. 또 사진 속 아이돌의 피부가 나쁘거나 살이 찐 것 같으면 어김없이 지적 댓글을 쓰는 것도 팬들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과도한 팬들의 개입이 간섭이 돼 사전검열제도처럼 작용하게 되는 건 아닌지 우려한다.  김작가 평론가는 “손님이 왕이라는 안 좋은 갑질 문화가 아이돌 판에서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연예계가 교과서처럼 마냥 도덕적인 행실만 가득하다면 그것도 재미없다. 예전에 사라진 사전검열제도가 대중 때문에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팬들의 입지가 커진 지금의 현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아이돌 전문 웹진인 아이돌로지의 문용진(필명 미묘) 편집장은 “아이돌의 공식 콘텐트에서 소수자 혐오 등 잘못된 부분이 보일 때 팬들은 그것을 가차 없이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정서영 인턴기자 chung.suh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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