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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인공지능·가상현실·3D프린팅 만나 신세계 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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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호 14면

기계와 손잡는 디지털 아트

서울예대 예술공학센터는 지난 1월 뉴욕 라마마극단과의 협연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사전에 영상으로 만들고 벽면에 투사해 연극과 영상의 경계를 깨는 실험극을 선보였다. 김지영·강만홍 배우가 로버트 패트릭 원작 ‘올 인 더 마인드’에서 연기한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다. [사진 서울예대]

서울예대 예술공학센터는 지난 1월 뉴욕 라마마극단과의 협연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사전에 영상으로 만들고 벽면에 투사해 연극과 영상의 경계를 깨는 실험극을 선보였다. 김지영·강만홍 배우가 로버트 패트릭 원작 ‘올 인 더 마인드’에서 연기한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다. [사진 서울예대]

“이제 ‘시(詩)의 이해’ 책의 그 장을 찢어 내라. 어떻게 학생들에게 시를 그래프로 측정하도록 만든다는 말인가. 시는 가슴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끼는 거야.”

예술가들 인텔·NASA와 협업 #“기술과 예술 독립적인 것 아니야” #코딩은 융합 예술가의 필수과목 #공학자와의 원활한 소통 중요 #공감 주는 완벽한 융합이 과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교사 존 키팅은 학생들이 찢어 낸 책장을 담을 휴지통을 들고 교실을 휘젓고 다닌다. 시에 대한 평가를 그래프의 X축(완성도)과 Y축(중요도)의 점을 연결한 영역의 크기로 설명한 책 내용에 반발하는 모습이었다. 이 장면은 감성적인 예술과 이성적인 과학기술을 서로 맞세우는 선입견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과학기술을 예술작업에 끌어다가 걸작품을 만들었다. 21세기 들어 컴퓨터의 폭발적 연산 능력과 네트워크의 연결을 토대로 꽃을 피우는 디지털아트 분야에서는 예술과 과학기술의 융합이 창작의 필요조건이 됐다. 최근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 3D(3차원) 프린팅 같은 첨단 테크놀로지가 몰려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와서는 예술이 기술과 만나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보여 주고 있다.

디지털 아바타가 공연하는 연극 ‘템페스트’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이 인텔과 협업해 만든 연극 ‘템페스트’에서 원통 안의 가상 디지털 아바타가 실제 배우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이 인텔과 협업해 만든 연극 ‘템페스트’에서 원통 안의 가상 디지털 아바타가 실제 배우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영국 런던 공연계는 이달 30일 새롭게 막을 올릴 로열셰익스피어극단(RSC)의 연극 ‘템페스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 연극은 RSC가 세계 최대 컴퓨터칩 회사인 인텔 등과 손을 잡고 만든 세계 첫 라이브 디지털 공연이다.

주연배우가 얼굴과 몸에 17개의 동작센서를 달고 움직이면 인간의 관절 수(360개)와 거의 같은 수(336개)의 관절을 가진 가상 디지털 아바타가 유령처럼 따라서 움직인다. 인텔이 개발해 놓은 증강현실(AR) 기술로 구현한 신화 속의 괴물은 무대 스크린에서 나와 관객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한다. 영국 언론들은 “VR과 게임 기술이 연극에 접목되는 디지털 연극의 새벽이 열렸다”고 평했다.

인텔에 따르면 전체 작업 과정은 고성능 컴퓨터에 의해 진행되며 주연배우의 아바타를 작동시킨 컴퓨터 메모리는 달 착륙 때의 5000만 배에 달한다고 한다. RSC의 디지털 개발팀장인 세라 엘리스는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체험을 창조하려고 2년여 동안 작업했다”고 말했다. RSC는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 셰익스피어 탄생지인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로열셰익스피어극장에서 공연한 데 이어 6월 런던 바비칸극장에서 다시 막을 올린다.

지난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 최대 디자인 전시 박람회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는 인간의 손이 아닌, 3D 프린터로 만들어진 조각 작품이 전시돼 놀라움을 줬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하고 이제는 고인이 된 자하 하디드의 건축사무소에서 출품한 ‘엽상체’라는 제목의 조각이었다. 작품을 컴퓨터로 디자인하고 로봇 같은 3D 프린팅 기계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스라엘 작가 이얼 기버는 지난 2월 미 항공우주국(NASA)과 협업해 만든 조각물을 우주공간에 설치했다. 이 조각물은 기버가 만든 소프트웨어로 사람의 웃음소리 파일을 3D 모델로 변형해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무중력 3D 프린터로 출력된 것이다. NASA 측의 앤드루 러시는 “기술과 예술이 서로 독립적이 아니라는 점을 세계가 보게 된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의 BBC는 기버에 대해 “컴퓨터 코딩에 미쳐 있는 예술가”라며 “코딩이 새로운 라틴어라면 기버는 디지털 다빈치”라고 비유했다.

예술작품 창작에 AI도 활용되고 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의 예술가 샘 크로닉은 그림의 스케치를 종이에 펜으로 하지 않고 3D 스캔을 떠 AI 프로그램으로 완성한다. AI를 이용한 음악 작곡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5월 개막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3000㎡(약 900평)의 하이퍼 파빌리온 전시장에 360도 영상, 홀로그램, 몰입형 영화 같은 디지털 영상작품들만 전시됐다. 국내 공연기획 회사 패뷸러스가 운영한 이 전시의 큐레이터를 맡은 필리페 리스-슈밋은 “디지털 예술을 전시한 게 아니라 모든 게 디지털로 연결된 디지털 시대의 예술작품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공연 시스템으로 두 무대 연결

국내에서도 예술과 과학기술의 융합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서울예술대학교는 지난 1월 뉴욕 브로드웨이 라마마극단 55주년을 기념하는 공동 공연에서 이 대학 안산캠퍼스의 예술공학센터와 라마마극장의 두 무대를 인터넷 화상 공연 시스템으로 연결, 양쪽의 배우들이 마치 하나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텔레마틱(Telematic)’ 공연을 했다.

이 공연에서 뉴욕의 연출가 제이슨 트루코는 배우들의 연기를 사전에 영상으로 제작하고 무대에 설치된 4개의 벽면에 투사해 연극과 영상의 경계를 깨는 새로운 실험극도 선보였다. 지난달 26~27일 LG아트센터에서 내한 공연을 한 영국의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는 ‘아토모스’에서 3D 이미지를 무대 허공에 띄우는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3D 안경을 쓴 관객들은 공간의 깊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는 지난 3월 몸에 착용하는 웨어러블 로봇들이 움직이고 18개의 드론이 무대 위를 떠다닌 ‘로봇 나무’라는 작품이 공연됐다.

인문학·과학기술 통합할 수 있어야

이처럼 예술가들은 첨단 기술을 ‘자기표현’의 재료로 쓰면서 예술의 ‘신세계’를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지난 3월 ‘뉴욕 예술 주간’ 전시에서 비디오 영상을 출품한 크리스 도랜드는 “기계와 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은 새로운 예술언어가 됐고 융합예술가들에게 컴퓨터 소프트웨어 코딩은 ‘필수과목’이 돼 가고 있다.

이에 따라 예술계에서는 새로운 개념의 예술가가 요구되고 있다고 지적된다. 예술적 창의성과 인문학적 소양에다 과학기술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의 중요성도 지적된다. 영국의 RSC가 인텔과 템페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텔 측 엔지니어들은 연극의 미묘한 표현을 알지 못하고, 연극인들은 엔지니어들의 논리적 작업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 예술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융합한 것만으로는 혁신적 작업의 성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융합이 전체 안에서 서로 잘 스며들어 관객에게 공감을 주는 ‘융합의 교향곡’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로보틱 아트 퍼포먼스 ‘로봇 나무’가 끝난 직후 열린 ‘연출가와 관객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기술적 성취는 놀랍지만 연극의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고 말해 전체적인 스토리텔링이 보완돼야 함을 시사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예술가들은 첨단 기술의 힘을 빌려 표현수단을 확장하고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이영렬
서울예술대학교 영상학부 교수


이영렬 신문기자(중앙일보) 출신의 경영학 박사, kt olleh tv(IPTV) 본부장을 역임했으며 ‘글로벌 인터넷tv 전문가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Managing ConsumersOnline Complaints』, 『IPTV 뉴 비즈니스 혁명』 등의 저서가 있다.

기존 음악·미술 모방에 그쳐 감동은 못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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