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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요리를 먹는 것은 섹스보다 황홀한 경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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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호 08면

[정재숙의 공간탐색] 프로듀서 이욱정의 쿠킹 스튜디오

책 수백 권, 냄비와 도마 수십 개, 접시와 컵과 수저와 포크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욱정의 주방은 그의 서재이자 실험실이며 꿈의 공장이다. 안충기 기자

책 수백 권, 냄비와 도마 수십 개, 접시와 컵과 수저와 포크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욱정의 주방은 그의 서재이자 실험실이며 꿈의 공장이다. 안충기 기자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펜화가인 안충기 섹션 에디터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폐업한 레스토랑에 차린 스튜디오 #요리의 미학 추구하는 다큐 산실 #“미식가 부친과 요리 잘하는 모친 #그분들의 입과 손이 나를 만들어” #“좋아하는 재료 있는 대로 넣고 #더 늦기 전에 요리 시작하세요”

이 연재물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음식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이욱정이다. 요리하고 먹는 인간을 좇는 푸드멘터리(푸드+다큐멘터리)의 선구자로 맛있는 음식에 대한 본능이 남다르다. 그는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나누는 따듯한 한 끼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우리의 영원한 미래임을 믿는다.



뻘겋게 녹슨 철판 위에 석기시대 동굴 벽화 같은 그림이 일렁인다. 인류 문명의 출발을 알리는 채집과 수렵, 농경과 수확의 풍경이다. 그 위에 ‘요리인류’ 넉 자가 선명하다. 인간은 먹어야 살고, 요리하며 진화하고, 음식으로 문명의 한길을 열었다. 요리하기에 존재하는 인류의 역사를 일찌감치 평생 주제로 삼은 그는 부엌을 작업실 삼았고, 그 간판에 ‘요리인류’라고 썼다.

서울 상수동 뒷골목 상가건물 2층은 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음식 다큐멘터리 전문가로 뼈가 굵은 이욱정 PD는 인사보다 먼저 두툼한 아보카도토스트를 내밀었다. 그는 “뚝딱뚝딱 만들어 먹고, 놀고, 읽고, 생각하고, 꿈꾸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에게 주방은 서재이고 실험실이고 놀이터다. 2012년 터를 잡았으니 5년여 그의 인생이 요리된 곳이다. 132㎡(약 40평)의 공간에 녹아든 냄새가 오묘하다. 세계 곳곳 인류가 창조한 각종 요리가 여기에 모여 문명 다큐멘터리로 태어났다.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어요. 이 작업실을 만들고 나서 제가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촬영장소로만 생각했는데 이젠 제 삶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저의 낙원이 됐습니다.”

폐업한 레스토랑 자리에 들어선 그의 쿠킹 스튜디오는 부엌시설이 핵심이긴 하지만 다용도공간으로 순간마다 변신한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거실, 제작팀이 모이면 회의실, 협력업체가 찾아오면 다큐멘터리 시사회장, 프로그램을 찍을 때는 녹화장이 된다. 몸이 익숙해지면서 퇴근 개념이 없어졌다. 요리평론가, 예술인, 방송 관계자들이 아지트처럼 종일 들락거린다. 거창한 요리랄 것도 없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꺼내 누구든지 주방에 들어가 한 접시 만들어 내오면 나눠 먹으며 웃고 떠드는 동안 저절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회사를 놀러 다니는 행운아가 접니다. 집보다 여기가 더 좋아요. 마음 통하는 이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큽니다. 돌아다니다 멋진 물건을 보거나 디자인이 좋은 제품을 보면 ‘어 이거 우리 작업실 어느 쪽에 놓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얼른 사죠. 해외 촬영 때 사들이는 주방도구며 그릇이 한 보따리씩 돼요. 그게 재산이죠. 다음 촬영 때 다 쓰이니까요.”

요리로 인류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부모님 덕이 컸다. 경영학 교수였던 부친은 월급을 먹는 데 다 썼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미식가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모친은 요리를 잘해 저녁은 늘 만찬이었다. 이욱정은 “아빠의 입과 엄마의 손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요리 자체의 미학을 추구하는 제 다큐의 특성이 어린 시절 이런 경험에서 왔어요. 음식이 만들어지는 순간순간의 색과 형태와 움직임을 심미적으로 담고 싶어요. 알고 먹으면 더 맛있죠.”

최근작인 ‘이욱정 PD의 도시의 맛’은 한층 깊어지고 있는 그의 요리 인문학을 보여 준다. 그는 도시가 음식을 크게 바꿨다고 생각한다. 레스토랑과 외식의 탄생은 도시가 현대인에게 준 선물이다. 음식을 창으로 도시를 들여다보면 더 흥미롭다. 정치 갈등 속에 혼란스러워하던 홍콩 사람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는 데 음식은 큰 구실을 했다. 페루의 리마가 미식의 메카로 급부상한 뒤에는 유명 요리사들을 지원한 지식인 연대운동이 있었다. 토착 음식의 현대화를 연구하며 레시피(음식 만드는 과정과 방법)를 공유한 그들의 협업은 일종의 문화운동으로 한식 세계화를 도모하는 우리에게 시사점이 많다고 했다.

“세상을 바꾸는 요리사들의 도시라고나 할까. 요즘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타파스·딤섬·초밥의 공통점은 가볍고 다양한 맛을 짧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한입거리라는 겁니다. 술의 조합도 빼놓을 수 없죠.”

그는 한식을 백과사전처럼 눈으로 읽을 수 있는 미니 다큐를 준비하고 있다며 “마지막 질문은 ‘같이 먹는 우리는 누구인가’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상수동 작은 주방에서 시작한 그의 ‘요리의 길’은 올 들어 여러 갈래로 뻗어 가는 중이다. 가을께 건축가인 최욱 ‘원오원건축’ 소장과 손잡고 서울 광화문에 심야식당을 내건 제2아지트를 만든다. 여의도 KBS 신관 2층에 298㎡(약 90평) 규모의 ‘쿠킹 스튜디오’를 개관한다. 요리 프로그램 제작과 방청, 식당을 겸한 다목적홀이다. 그가 만든 푸드멘터리가 국내외 시장에서 거둔 성과가 큰 힘이 됐다.

“멋진 요리를 먹는 것은 섹스보다 황홀한 경험”이라는 그의 지론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한마디가 날아온다. “죽이든 밥이든 더 늦기 전에 당신이 좋아하는 재료를 있는 대로 집어넣고 무언가 당신만의 요리를 시작하세요.”


앞치마 10벌, 주방 인생 훈장처럼… 

이욱정 PD 작업실의 옷걸이에는 앞치마 10여 벌이 걸려 있다. 그날그날 기분따라, 요리 성격에 맞춰 골라 입는 일복이자 출연의상이다. 외국 출장길에 산 다양한 문양의 이국적인 앞치마들이 10여 년 주방 인생의 훈장처럼 그의 몸을 감싼다.

그가 가장 즐겨 입고 좋아하는 앞치마는 일종의 리폼(reform) 의류다. 8년쯤 입고 다닌 자신의 청바지를 소재로 만들었다. 이 두툼하고 낡은 청앞치마를 걸치면 마음이 편해지고 요리도 잘된다. 앞치마는 그의 첫째 벗이다.

스튜디오의 둘째 벗은 화덕이다. 이 공간을 만들 때부터 그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불’은 주방의 여왕이다. 오븐에 구은 음식과 화덕의 불에서 구워져 나온 음식은 맛의 농도가 다르다. 그는 화덕을 만나면 요리사의 태도가 달라지고 요리도 변한다고 믿는다. 알록달록 타일로 치장한 화덕 앞에서 그는 불을 다루는 대장장이처럼 강건해 보였다.

셋째 벗은 수십 종의 향신료 병이다. 세계를 돌며 인류의 맛을 탐미해 온 그에게 향신료는 그 정점에 서 있는 보물이다. 어느 도시에 가건 맨 먼저 시장으로 달려가 새로운 향신료를 사들인다. 코를 자극하는 신기한 양념감은 오감을 깨우는 인생의 맛이다.



이욱정. ‘누들로드’ ‘요리인류’ ‘이욱정 PD의 도시의 맛’ 등 요리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개척한 KBS 프로듀서. 음식에 담긴 인간의 창의성을 탐구하고 요리라는 창을 통해 문명을 바라보는 일을 천직이라고 여긴다. 휴직계를 내고 런던 ‘르코르동블루’ 요리학교를 수료할 만큼 음식으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2008년 ‘누들로드’로 다큐멘터리계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피버디 어워드’ 예술문화부문 TV 다큐멘터리상을, 2015년 ‘요리인류’로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작품상을 받았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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