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 길로 화살처럼 달려왔지만 결국 언어의 감옥에 갇혔던 삶"

중앙일보

입력

소설가 황석영씨가 자신의 일생을 녹인 회고록 『수인』을 냈다. [사진 문학동네] 

소설가 황석영씨가 자신의 일생을 녹인 회고록『수인』을 냈다. [사진 문학동네]

소설가 황석영(74)씨가 방북 체험을 담은 회고록 『수인(囚人)』(전2권·문학동네)을 냈다. 200자 원고지 4000쪽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이다. 2004~2005년 본지에 연재했던 자전소설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를 바탕으로 한 회고록은 유년시절부터 불법 방북으로 5년간 수감됐다 풀려난 1998년 3월까지를 다룬다. 큰 체격에 쇳소리 음성을 내던 김일성, 고 김대중 대통령에 비판적인 책을 쓰면 출옥시켜주겠다고 정보 기관원이 회유했던 일, 80년대 전반 문화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문화활동 시절 등 자신의 이력에 각인된 시대의 단면들을 빼곡히 담았다.
 황씨는 8일 기자간담회에서 "잠시도 옆을 돌아보지 않고 한 길로만 화살처럼 달려왔다"고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작품과 인생을 합치시키고자 했던 삶"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 같은 한반도라는 감옥에 갇혔던 삶"이었다고 했다. 역사적 책임의식이라는 시대적 사명도 결국 작가의 자유를 속박하는 굴레였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책 제목이 '수인'이라는 것, 결국 자유에 관해 얘기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황석영 회고록 『수인』 표지.

황석영 회고록『수인』 표지.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황씨는 "방북 이후 망명 시절 일찌감치 정리한 입장인데, 나와 다른 타자가 아니라 나의 또 다른 면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물국가가 아니라 북한 역시 현대적 모더니티의 산물"이라며 "50, 60년대 이상주의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지만 이후 바깥세상에 대해 농성체제로 전환하면서 우리도 겪어 익숙한 군사독재, 사회주의 이상을 까먹은 군사 파시즘 성격으로 변질됐더라"고 회고했다. "지진이 일본의 리스크인 것처럼 핵 개발 중인 북한은 우리의 리스크인데, 지난 9년간 보수 정권은 리스크를 관리하는 주도권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남북한 간 긴장이 고조되는 치킨게임에서 벗어나 북한이 농성체제를 풀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5·18 기념식에서 제창이 허용된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황씨가 82년 제작한 사연은 유명하다. 황씨는 "한 때 내가 방북해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동아시아 10여 개국에 수출돼 각자의 버전으로 불린다고 들었다"며 "그런 점에서 국제 노동운동 가요인 인터내셔널가(歌)의 동아시아 버전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황씨는 회고록을 어머니에게 바친다는 헌사를 책머리에 붙였다. 그에 대해 "작가는 '자기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일'이라며 극구 말리셨지만 내가 뭘 잘못하면 매를 드시는 대신 반성문을 쓰게 하셨다. 일종의 자가당착에 빠지셨던 거고 결국 나를 작가로 키우신 셈"이라고 말했다.
 거친 세월을 뚫고 나온 원동력을 묻자 "결국 문학"이라며 "베트남전 참전 당시 첫 전투에서 여기서 살아나가면 반드시 좋은 글 쓰겠다고 하늘에 빌고 빌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