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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스캔들 도화선은 푸틴과의 동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월 취임 직후 백악관에 제임스 코미 FBI국장을 불러 악수를 나누는 트럼프 대통령.

지난 1월 취임 직후 백악관에 제임스 코미 FBI국장을 불러 악수를 나누는 트럼프 대통령.

제임스 코미 미국 연방수사국 (FBI) 전 국장이 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의 '러시아 스캔들 수사중단' 외압 사실을 폭로하면서 '러시아 스캔들'의 내용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트럼프 캠프의 플린 국가안보보좌관 러시아 접촉 증가에 주목 #대선 내통, 수사중단 외압 '증거물' 확보에 탄핵 여부 결정될 듯

러시아 스캔들의 도화선은 2015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통령선거 경선이 한창이던 때다. 의혹의 주인공은 마이클 플린. 대선 당시 트럼프를 공개지지했고 트럼프가 당선 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던 인물이다.

2015년 12월 당시 플린은 33년 간의 군 생활을 마친 예비역 중장 신분이었다. 사이버 안보 관련 비즈니스에 관여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관영 방송사 RT의 창립 10주년 행사에 초청을 받고 참여했다고 한다. 문제는 플린과 같은 테이블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앉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플린 귀국 후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대사와의 왕래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는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았다.

러시아 측과 접촉한 경위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러시아 측과 접촉한 경위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그러던 중 경선이 마무리 국면으로 흘러가던 지난해 6월 '구시퍼 2.0'이란 해커가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내부자료를 해킹해 공개하면서 러시아의 대선개입 의혹이 떠올랐다. 구시퍼 2.0이 러시아 정부와 깊숙이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다. 당시 해커가 공개한 건 민주당 DNC 수뇌부가 사실상 힐러리의 경선 승리를 위해 경쟁자인 버니 샌더스를 깎아내리는 내용이 오간 이메일 등이었다.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은 "러시아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막고 트럼프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DNC를 해킹한 의혹이 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 정보기관 중 최초로 FBI가 내사에 착수했다.

지난달 1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만난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대사(오른쪽). 왼쪽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지난달 1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만난 세르게이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대사(오른쪽). 왼쪽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키슬랴크 주미 러시아대사를 감청 등을 통해 주시하던 FBI의 수사망에 플린과의 접촉이 탐지됐고, 이에 코미 국장은 러시아의 대선 개입 가능성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트럼프 캠프는 몸을 사리기는 커녕 플린 외에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당시 상원의원), 트럼프의 정치멘토 로저 스톤 등까지 러시아 측과 접촉을 이어갔다.

트럼프 당선 후에도 정보기관은 러시아의 대선개입 의혹을 계속 쫓았고, 트럼프의 취임 2주 전인 올해 1월 6일에는 FBI와 중앙정보국(CIA), 국가정보국(DNI), 국가안보국(NSA)의 4개 정보기관 수장이 "푸틴이 트럼프의 당선을 위해 미 대선 개입을 지시했다"는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러시아의 대선개입이 러시아의 독단적 판단에 따른 것인지, 트럼프 측과의 내통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트럼프가 임기를 6년 남긴 코미를 전격 경질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트럼프는 "코미가 무능력하기 때문"이란 이유를 들었지만 민주당과 미 언론은 "수사망이 점차 좁혀오자 수사를 차단하기 위해 내린 결정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트럼프는 청문회 증언 하루 전 '성명'이라는 이례적 수단을 통해 트럼프의 수사 중단 외압을 공개했다. 코미의 증언이 가져다 줄 폭발력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미국 정계가 코미의 증언을 플린과 연관된 부분에만 한정해 볼 것인지,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의 내통 의혹 전반으로 확대해 해석할 것인지도 관전 포인트다.

코미는 트럼프에게 러시아 스캔들 수사 중단을 요구받은 다음 날 세션스 법무장관을 만나 FBI의 독립을 위해 다시는 트럼프와 독대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세션스 장관은 답을 하지 않았고, 이에 코미는 대통령이 플린의 수사를 중단하라고 했다는 내용은 보고하지 않았다. 세션스 역시 트럼프 캠프의 좌장으로 일하면서 키슬랴크 대사를 만나는 등 러시아 스캔들의 이해 당사자이기도 하다. 세션스는 러시아 스캔들 수사 지휘를 포기했고, 이 때문에 트럼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트럼프의 맏사위이자 실세로 떠오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도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해 FBI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 쿠슈너도 플린과 함께 키슬랴크는 물론 세르게이 고르코프 러시아 국영 대외경제개발은행(VEB) 은행장과 만났고, 나아가 러시아와 비밀 대화 채널을 구축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VEB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기업이다.

NYT는 VEB가 단순한 은행이 아니라 러시아 정부 기관과 마찬가지라고 분석했다. 플린은 트럼프 취임 전 키슬랴크와 '대 러시아 제재 해제'를 논의하고, 러시아 기업에서 받은 고액의 강연료 등을 공직자 재산신고에서 누락하는 등 물의를 빚어 25일만에 경질된 바 있다. 트럼프의 가족까지 포함한 주변 인물들이 대거 연루된 셈이라 최종 타겟은 자연히 트럼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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