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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추경이라는 이름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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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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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본예산도 그렇지만 특히 추가경정예산은 정치적이다. 돈을 쓰면 표심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김대중 정부 시절까지 추경은 연례행사였다. 정부·여당은 생색내고, 야당은 떡고물을 챙겼다. 여야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니 마다할 턱이 없었다. 추경 때문에 나라 곳간이 비게 생겼다는 말까지 나왔다. 노무현 정부가 2006년 추경 요건을 ▶전쟁 또는 대규모 재해 발생 ▶경기 침체·대량 실업·남북 관계 변화 등으로 엄격히 제한한 것도 그래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테면 ‘추경에도 원칙과 절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공무원 일자리 17만 개 #원점 재검토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신을 이은 문재인 정부의 첫 추경은 어떤가. 기획재정부는 “청년 실업이 사상 최고이며 대량 실업 우려가 있다”며 추경 요건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1분기 경제 지표가 회복세인 만큼 이런 정부의 경기 진단엔 이견이 있지만, 추경을 거칠게 반대할 명분은 못 된다. 진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경은 본예산과 다르다. 제한적·일시적이며 일회성·응급성이 원칙이다. 추경이 주로 특정 사업비 위주로 편성되는 이유다. 특히 경직적·항구적 성격이 짙은 인건비는 추경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수년~수십년간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떠안길 공무원 증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정부도 할 말은 있다. 기재부는 “공무원 1만2000명 증원이야말로 일자리 사업”이라며 “단순 인건비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그럴수록 본예산에서 정식으로 따져야 한다.

둘째,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편법이다. 이번 추경의 핵심은 공무원 일자리다. 올해 뽑는 1만2000명은 대통령 공약인 81만 개 공공 일자리의 씨앗이다. 올해 추경엔 달랑 선발 비용 80억원만 책정돼 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인건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언급한 7급7호봉(연 3400만원)을 기준해도 최소 4080억원이 들어간다. 이 숫자가 5년 내 17만 명까지 늘어난다. 이들의 연공서열이 올라갈수록 재정부담도 커진다. 30~40년간 많게는 최대 120조원에 달할 것이란 추산도 있다. 이렇게 재정에 큰 부담을 주는 사업을 추경을 통해 ‘알박기’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기재부 예산통들은 이런 편법을 ‘코끼리 코 밀어 넣기’라고 부른다. 익히 알려진 난센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에 빗댄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연다→코부터 밀어 넣는다→몸통을 넣는다. 초대형 건설공사라도 설계 도면(코끼리 코) 예산 하나만 일단 밀어 넣으면 이듬해부터 본 공사(몸통)가 ‘계속 사업’으로 집행되게 마련이다. 예산통들은 본능적으로 ‘코끼리 코 밀어 넣기’를 혐오한다. 몸을 던져 막는다. 이번 추경을 지휘한 김동연 경제부총리 내정자는 예산통이다. 그가 왜 본능을 저버렸는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새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첫 추경을 마냥 반대할 일은 아니다. 이번 추경은 내용도 나쁘지 않다. 지난 정부 것에 비하면 나눠먹기나 군더더기도 적다. 이럴 때 필요한 게 협치요 타협이다. 핵심 쟁점은 공무원 증원이다. 야3당은 “나랏빚만 크게 늘릴 것”이라며 반대다. 세금으로 공무원을 늘리는 것을 놓고 국민적 논란도 크다. 이것만 따로 떼 내년 본예산에 넣으면 어떨까. 그런 뒤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해 보는 것이다. 80억원짜리 공무원 일자리에 집착하다 11조 추경을 통째로 놓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여권은 대선공약이란 이유로 그냥 밀어붙일 기세다. 대선공약이라고 신성 불가침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4대 강도 대선공약이었다. 금융위기 극복이란 명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임기 내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 탓에 지금껏 뭇매를 맞고 있다.

전 정부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도 국민적 공감대 없이 절차를 무시하고 서둘렀다며 원점 재검토를 지시한 문재인 정부다. 아무리 대통령 공약이라지만 81만 개 공공 일자리는 세세년년 많게는 100조원 넘게 국가 재정 부담을 늘리는 일이다. 원점 재검토는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