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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항목 미리 검증 … 미국 청문회엔 ‘위장전입’ 논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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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달 11일 미국 상원은 로버트 라이시저(69)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새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인준했다. 라이시저가 후보자로 지명된 건 1월 3일.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는 데까지 무려 128일이 걸린 셈이다. 불과 며칠이면 장관 청문을 끝내는 한국 사정과는 크게 달랐다.

윤리청 중심 FBI·국세청도 나서 #2주간 가족·친지까지 기초조사 뒤 #두달여 후보자 추궁, 위증 땐 징역형 #청문회선 정책 관련 검증에만 집중 #트럼프, 장관 청문회 속전속결 요구 #윤리청장 “검증 끝나기 전엔 안돼”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끈 건 128일이나 걸린 인준 과정 청문회에서 각종 탈법이나 부패, 위장전입과 같은 부도덕한 문제로 공방이 오가는 장면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존 매케인, 밴 새시 등 여당인 공화당 중진의원들이 오히려 “강경파인 당신이 지나치게 강력한 통상압력을 우방국에 가해 결과적으로 미국 소비자와 경제에 해를 끼치는 협상을 할 것이 우려된다 ”며 조목조목 따졌다. 또 다른 의원들은 라이시저가 1980년대 후반 브라질의 농업 관련 업무에 관여했고, 90년대 초에는 중국의 전자산업에 조언한 점을 문제 삼았다. 청문 내용의 100%가 통상 관련 정책, 그리고 이해 충돌 여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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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이 같은 정책 청문회가 가능한 배경에는 철저한 ‘사전 검증’이 자리 잡고 있다. 미 정부 윤리청(OGE)을 중심으로 연방수사국(FBI)·국세청(IRS) 등의 윤리조사관이 후보자의 비윤리적 행동이나 이해 상충 혐의가 있는 문제를 미리 조사해 샅샅이 걸러낸다. 이들이 사전 검증하는 조사항목만 233개. 본인은 물론 가족·친지 도 대상이다.

OGE 등 조사기관들은 일단 2주에 걸쳐 ▶개인과 가족 배경(61개 항) ▶직업 및 교육적 배경(61개 항) ▶세금납부(32개 항) ▶교통범칙금 등 경범죄 위반(34개 항) ▶전과 및 소송 진행(35개 항) 등을 조사한다.

이후 대략 2개월에 걸쳐 후보자를 상대로 사전 검증 내용에 대한 추궁을 한다. 여기에서 허위로 진술을 할 경우 연방법에 의해 5년 이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 같은 철저한 사전검증 과정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대통령이 후보자 인준동의안을 상원에 제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 과정은 2~3개월이 소요된다.

트럼프가 지난해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이 지명한 장관 후보자에 대해 속전속결로 인사 청문회를 진행하려 하자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선 곳은 민주당이 아닌 바로 OGE였다. 당시 월터 샤웁 OGE 청장은 상원 원내대표들에게 서한을 보내 “내가 40여 년간 OGE에서 일했다. 그런데 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끝나기도 전에 청문회 일정이 확정된 적은 없었다”며 쐐기를 박았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의 청문회는 OGE의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상무차관에 내정됐던 토드 리게츠 프로야구 구단 시카코 컵스 공동구단주 등이 윤리 검증 문턱을 넘지 못해 인준 청문회에 가보지도 못한 채 자진사퇴로 몰렸다.

‘군복무 회피’‘술·여자 좋아한다’고 낙마도

OGE 등의 사전검증에 걸려 낙마한 경우는 다수다. 1976년 지미 카터 행정부에선 시어도어 소렌스 중앙정보국(CIA) 국장 후보자가 한국전 당시 군 복무를 꺼린 사실이 드러나 지명 철회됐고, 89년 존 타워 국방장관 후보자는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장관으로 인준받지 못했다. 타워는 이를 해명하는 자리에 나와 “과거에는 술을 지나치게 마셨지만 이제는 알콜과 관련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장관이 되면 술을 완전히 끊겠다”고 선언했지만 소용없었다. 도덕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2008년 미 상원의 민주당 원내총무 출신 중진의 톰 대슐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보건부 장관으로 내정됐지만 2005년부터 3년간 운전기사를 고용하면서 세금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져 자진 사퇴했다.

일각에선 미국의 고위공직자 사전검증 시 후보자 이웃의 평판까지 듣고 있다고 한다.

인사청문회를 정책과 능력 위주 검증으로 시스템화하기 위해선 청문회에 나서는 후보자에 대한 깊이 있는 검증이 먼저 이뤄져야 함을 미국의 고위공직자 청문회 제도가 보여주고 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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