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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소선거구제로는 지역 정당 못 벗어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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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다수 유권자 외면하는 선거제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가야사 복원을 지시했다. 그의 말마따나 뜬금없다. 내각이 아직 구성되지도 않고, 각종 개혁 과제에 손도 대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갑자기 국정기획위원회의 지방정책 공약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꼭 넣어 달라고 주문했다.

40% 안 되는 득표로 과반 의석 차지 #소선거구제는 거대 정당에 유리 #소수 대변 정당은 존립 어려워 #지역감정의 뿌리는 선거제도 #한 지역에서 둘 이상 경쟁하는 #선거여야 정치가 썩지 않는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는 것이다. 지역 갈등 문제가 얼마나 그를 괴롭혔으면 그런 주문을 했을까.

한국 정치를 분석하는 가장 중요한 틀은 지역 갈등이다. 대통령선거에서 기초의원 선거, 공무원 인사에까지 지역 문제가 개입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문 대통령은 선거 막판까지 호남 민심을 붙잡기 위해 마음을 졸였다.

지역 갈등은 일차원적이다. 본능에 가까운 원시적 감정이다. 때로는 이념적 차이까지 겹쳐 격렬하게 분출한다. 하지만 대개 이념적 갈등은 부끄러운 지역감정을 감추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때로는 안보, 때로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화장을 하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지역 문제가 본질인 경우가 많다. 각 정당들도 부끄러워 표면에 내세우지 않을 뿐이다.

어느 지방에서 태어나느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조상들은 영남에 살았지만 정작 본인은 호남에서 나고 자랄 수 있다. 거꾸로도 가능하다. 몇 대를 내리 한 마을에 터 잡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그게 어떻게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고, 국가 대사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가. 우리도 모르게 지극히 비이성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역감정의 뿌리는 정치제도

지역감정은 정서의 문제로 인식된다. 하지만 갈등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부추기는 것은 정치다. 그것이 크게 폭발한 것이 1987년이다. 그때 우리 사회의 양심으로 인정받은 ‘재야(在野)’마저 쪼개졌다. 정치의 힘은 가공할 만했다. 대선에 이어 그 이듬해 13대 총선은 1지역구 1인 소선거구제로 치러졌다. 이것은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봉건 영주로 삼아 나라를 조각 내버렸다.

급기야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을 고립시키며, 나머지 3당이 합당함으로써 지역 할거 정치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더구나 97년 대선에서는 이념이나 정책적으로 반대쪽에 서 있던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함으로써 지역 할거가 이념을 뛰어넘어 한국 정치의 핵심 요소임을 입증했다.

특정 지역의 피선거권 제한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지역 갈등의 해법을 정치제도에서 찾았다. 모든 것을 가지면서도 한 명만 선택해야 하는 대통령 중심제, 여기에 문제의 초점이 있다고 봤다. 지역감정이 고조될수록 인구수가 적은 지역 출신에게는 필패(必敗) 구조이기 때문이다. 호남 출신인 김대중 대통령이 DJP 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했지만, 그것도 이인제 후보가 보수 표를 쪼개주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내각제를 모색해 왔다. 내각제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와 지역 갈등 구도를 완화해 줄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인구수에서 열세인 충청을 기반으로 한 JP의 집권 의욕과 맞물려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출신 지역을 따지면 호남·충청을 합쳐도 영남보다 적다. 다수 지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통령 후보가 될 피선거권을 사실상 제한당한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 지역주의를 부수건, 현행 권력구조를 바꾸건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개헌이냐 선거제도 개편이냐

내각제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현재의 지역화된 양당구조에서는 내각제가 오히려 갈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 지난달 19일 청와대에서 5당 원내대표들을 만난 문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인식을 담고 있다. 그는 선거제도 개편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 과정에 국민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해 반영하고, 선거제도 개편도 함께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거구제 개편은 개헌하고도 맞물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 스스로 권력 분산형으로 가더라도 대통령 체제 유지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 왔으나 만약 선거구제 개편 등이 같이 논의된다면 다른 정부 형태, 다른 권력구조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선거구제가 왜 문제인가

국회의원 선거는 해방 이후 대부분 소선거구제였다.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부에서만 1지역구 2인 선거구제였다. 민주화 기운이 무르익어 야당세가 강해지자 여야 동반 당선 구조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 국회 의석 3분의 1에 해당하는 비례대표를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나 제1당에 비례대표 3분의 2를 우선 배정하는 횡포까지 부렸다.

그런 점에서는 13대 국회에서 소선거구제로 복귀한 것이 민주화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 프리미엄을 갖고 있던 민정당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3김을 중심으로 전국은 봉건체제의 영지처럼 분할됐다.

득표 따로, 의석 따로

민주화의 과정으로 부활한 소선거구제가 왜 문제인가. 사표(死票)를 많이 만든다. 표의 가치가 달라진다. 한 정당이 얻은 표와 의석 사이에 차이가 크다. 헌법재판소가 표의 등가성(等價性)을 높이도록 요구한 것을 고려하면 문제가 많다. 헌법재판소는 최소-최대 선거구 인구 편차를 1995년에 4대 1에서 2001년 3대 1, 2014년에 2대 1 이하로 제한하라고 주문했다.

20대 총선에서 각 정당이 얻은 표와 의석수를 비교하다 깜짝 놀랐다. 서울 지역에서 각 정당이 얻은 의석수는 새누리당 12석, 더불어민주당 35석, 국민의당 2석이었다. 그러나 시·도별 정당 투표로 얻은 비율대로 의석을 나누면 새누리당 16석, 민주당 14석, 국민의당 15석, 정의당 4석이 된다. 민주당은 실제 얻은 의석의 절반도 안 되고, 국민의당은 7배가 넘는다.

대개 지역 기반 정당의 의석이 크게 줄어든다. 새누리당은 부산에서 12석→8석, 대구 8석→7석, 경북 13석→8석, 경남 12석→8석이 된다. 호남을 휩쓸었던 국민의당은 광주 8석→5석, 전북 7석→5석, 전남 8석→5석으로 줄었다. 대신 민주당이 40석, 국민의당이 0석이었던 경기도에서는 두 정당이 함께 17석씩 얻는 것으로 계산된다. <표 참고>

17대 총선에서도 열린우리당은 정당득표율이 38.3%였지만 지역구와 비례의원을 합한 총 의석수는 50.8%인 152석을 차지했다. 18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정당 득표율 37.5%였지만 의석은 51.2%인 153석,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42.8%를 득표하고 50.7%인 152석을 차지했다. <표 참고>

나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

소선거구제는 지역주의를 증폭시킬 수 있다. 지역 정당이 생긴다는 말이다. 지역 정당화는 유권자의 투표권을 박탈한다. 3김 시절 ‘말뚝을 박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고 말할 형편이 되는가. 최소한 한 지역에서 두 개 이상의 정당이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정치가 썩지 않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87년 평민당을 창당한 논리는 ‘80%가 넘는 국민이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한다’였다. 소선거구제에서는 거대 정당이 과대 대표된다. 본인의 표를 사표로 만들지 않기 위해 억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지역구 의석 2개를 얻었지만 시·도별 득표 비율로 계산하면 21석이 된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선택을 고민했다. 차선(次善)이라도 선택하고 싶었지만 차악(次惡)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양당제와 극한 대결 국회

선거 때 감정이 고조되면 양극단 세력이 주목을 받는다. 국회가 난장판이 될수록 반대 세력을 질타하는 ‘사이다’가 박수를 받는다. 이번 대통령선거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토론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지지율은 오르지 않았다. 토론을 잘못한다고 비난을 많이 받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표를 얻었다.

대화와 타협의 성숙한 정치를 위해서는 중도 세력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양극단으로 강력한 원심력이 작용한다. 현재의 어설픈 다당 체제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현행 선거제도를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

중·대선거구제도 하나의 대안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5년 2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국회에 제안했다.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고, 권역별로 확정된 총 의석을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다. 지역구에서 생기는 불비례를 비례대표로 보정하는 독일식이다. 석패율제도 포함했다.

지역구 의원 246명을 200명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의원을 54명에서 100명으로 늘리라는 제안도 포함했다.

그러나 국회는 20대 대선을 앞두고 오히려 지역구 의원을 253명으로 늘리고, 비례대표는 47명으로 줄였다. 비례대표를 둔 의미가 무색해졌다. 의원들의 기득권 때문이다. 선거법을 고치기가 헌법을 고치기보다 어렵다고 하는 이유다. 더 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이제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