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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대통령 삐뚤어진 과시욕, 국제질서 뒤흔든 ‘외교 참사’ 불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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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호 15면

[글로벌 뉴스토리아] ‘아메리카 워스트’ 트럼프의 2주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질서와 가치·신뢰 체계를 온통 뒤흔드는 데는 2주(5월 19일~6월 1일)면 충분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19일 사우디아라비아를 시작으로 22일 이스라엘을 거쳐 24일 바티칸을 순방했다. 이어 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와 26~27일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각각 참석했다. 이슬람·유대교·가톨릭의 중심지를 도는 성지순례에 미국이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나토와 G7의 정상회의 참가를 더한 성격이었다. 지난 1월 취임 이후 첫 해외 방문으로 관심을 모았던 이 여행은 ‘글로벌 악몽’을 불러왔다.

파리협약 탈퇴로 국제 이단아로 #나토에선 집단 방위 약속 거부 #‘GDP 2% 이상 국방비’만 다그쳐 #사우디에 무기 1100억 달러 팔고 #숙적 이란 비난해 중동 질서 흔들 #이란과 핵 협상했던 오바마 격하

[워싱턴 신화=뉴시스]

[워싱턴 신화=뉴시스]

트럼프는 지난 1월 취임 이후 국가나 글로벌 사회의 가치가 아닌 지지자들의 표만 노린 포퓰리즘적인 일탈 정치를 계속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가 임기 중 공들였던 여러 정책을 허무는 데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지적도 함께 받고 있다. 트럼프는 이번 순방으로 지지자를 결집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전임자를 뭉개고, 자신을 비즈니스 대통령으로 과시하겠다는 과욕을 부리면서 ‘외교 참사’를 줄줄이 불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위해 중동평화 정책, 서구의 동맹질서, 지구온난화 공동 대처 같은 전 지구적인 미래 어젠다가 희생양이 된 것으로 지적된다.

‘195개국 약속’ 파리기후협약 뒤집어

정점을 찍은 사건은 지난 1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오늘부터 미국은 파리기후변화협약의 전면적인 이행을 중단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2015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195개국이 모여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온실가스 배출을 단계적으로 감축하기로 약속한 파리협약에서 탈퇴한다는 선언이다. ‘미래 세대를 위한 인류의 선택’으로 평가받는 이 협약은 오바마가 재임 중 역점을 뒀던 것으로 그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경제 규모 세계 1위에 온실가스 배출량은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인 미국이 빠지면서 협정이 물거품이 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는 협정 탈퇴를 선언하면서 “나는 파리가 아니라 피츠버그의 대표로 선출됐다”며 “오하이오주의 영스타운,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 펜실베이니아주의 피츠버그를 프랑스 파리보다 앞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지역은 미국 중서부 ‘러스트 벨트(쇠락한 중서부 공업지대)’에 포함된 곳으로 그의 주요 지지 기반이다.

트럼프는 파리협약의 기준을 맞추면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30조 달러와 650만 개의 일자리를 잃는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대선후보 시절엔 “석탄 등 미국의 화석연료 산업을 부흥시켜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친환경 정책을 거부하고 탄광과 굴뚝 산업을 키워 미국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 ‘시대착오적인’ 공약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결국 트럼프는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해 인류 미래를 위한 국제사회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글로벌 리더십을 스스로 차버리면서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미국 불신, ‘메르켈 독트린’ 불러

하지만 탈퇴는 미국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전망이다. 전 세계의 뜻을 정면 거부한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도 동반 추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차지할 위상도 흔들리게 됐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파리기후협약 거부로 “미국이 참여를 거부했던 시리아·니카라과와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 비꼬았다.

트럼프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멸도 극심해질 전망이다. 그는 평소 “지구온난화는 사기”라고 주장해 왔다. 이처럼 음모론이나 신봉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과학적 연구 결과와 집단 지성의 탐구, 그리고 협상을 통한 글로벌 사회의 타협을 대놓고 거부한 트럼프를 감정적인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로 보는 시각도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릴 수 있다. 결국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역설적으로 ‘아메리카 워스트(America Worst·미국 최악)’라는 비난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나토 정상회의에선 ‘채권관리자’처럼 굴어 동맹국에 실망을 안겼다는 평가다. 동맹 28개국 중 23개국이 국방비를 가이드라인인 GDP의 2% 이상 지출하지 않는다고 동맹국들을 닦달하고 “이들 국가는 미국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놀란 유럽 미디어들이 트럼프가 동맹국 지도자들을 ‘야단쳤다(scold)’고 표현했을 정도다. 게다가 트럼프는 ‘한 나라에 대한 군사 공격은 회원국 전체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해 즉각 개별 회원국 또는 집단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의 나토 헌장 5조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거부했다. 1949년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 당시 나토가 설립된 이래 이를 거부한 건 트럼프가 처음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일부 유럽 미디어는 이를 두고 전통의 민주주의 가치동맹인 유럽을 사우디, 심지어 냉전 이래 적국인 러시아보다 푸대접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기까지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나토에 대한 트럼프의 행동은 국가적으로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국가적인 수치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심지어 단체 사진을 찍을 때 6월 나토에 새로 가입할 예정인 몬테네그로의 두스코 마르코비치 총리를 몸으로 밀쳐 내고 앞줄 가운데를 차지했다. 친러시아 국가 세르비아에서 2006년 분리 독립한 몬테네그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항의에도 어렵게 나토를 택했다. 그의 결단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밀쳐 낸 트럼프의 행동은 ‘아메리카 퍼스트’가 이런 것이냐는 비아냥을 불렀다.

트럼프는 G7 정상회의에서도 물과 기름처럼 행동했다. 다른 여섯 정상의 권유에도 끝까지 버티며 파리기후협약 지지에 반대했다. 회의에서 돌아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며칠간의 경험을 보면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고 말했다. 대상이 미국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발언이었다.

유럽의 맹주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친미 노선을 걸어온 독일의 보수정당 지도자인 메르켈이 미국 주도의 동맹 구도에 회의를 표시한 셈이다. 이 발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메르켈 독트린’ ‘유럽 독립선언’ 등으로 불릴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동서 사우디-이란 대결 부추겨

트럼프는 앞서 중동 순방에서도 실수를 저질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이란을 테러를 돕는 나라라고 맹공했다. 친사우디·반이란 정책을 펴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란은 버락 오바마 정권이 오랜 세월 대화와 협상으로 지난해 1월 국제사회와 함께 성사시킨 핵 협상의 당사자다. 협상 결과 이란은 핵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국제사회는 이란에 해외재산 동결을 포함한 경제 제재를 풀기로 했다. 지난달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개혁·개방파로 핵 협상을 주도한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재선된 이란은 이제 막 국제사회 복귀를 위해 닻을 올린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을 테러 국가로 묘사한 트럼프의 사우디 발언은 오바마의 노력으로 모처럼 해빙기를 맞은 이란을 다시 적으로 돌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따라 중동에서 사우디와 이란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가능성이 있다. 일부 미국 언론은 사우디를 중동 맹주로 표현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우디는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일 뿐으로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과 종파는 물론 지역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 왔다. 21세기 인류의 비극인 시리아 내전도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수니파 반군과 이란이 밀고 있는 시아파 정부군 간의 대리전 성격이 있다. 민간인 오폭 사건이 줄을 잇는 예멘 내전도 비슷한 성격이다. 다수 시아파 중앙정부가 소수 수니파를 억압하는 이라크도 이란과 시리아의 세력 각축장이다. 바레인에선 사우디가 미는 수니파 왕실과 시아파 국민 간의 대립이 첨예하다.

그런 중동에선 사우디와 이란, 또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을 조절하는 것은 평화와 안정을 위해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트럼프는 그런 상황에서 지역의 세력 균형을 이루려고 애썼던 오바마의 정책을 뒤집고 사우디를 일방적으로 편들었다. 트럼프는 막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있는 이란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트럼프가 이런 이란을 흔드는 것은 중동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이란 국내에서도 대외 개방을 주장하는 개혁파보다 핵 협상을 반대하는 완고한 보수파의 목소리만 커지게 할 수 있다.

트럼프의 이런 일탈을 유발하기 위해 사우디는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사우디와 미국은 지난 5월 20일 방위협정을 체결하고 1100억 달러 규모의 무기를 사주기로 했다. 두 나라는 앞으로 10년 동안 3500억 달러의 군사장비를 거래하기로 했다. 사우디는 미국의 방위산업·제조업·정유업체들과 550억 달러 상당의 사업 거래 계약도 맺었다. 트럼프는 자신을 유능한 비즈니스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사우디에 현혹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중동 질서를 흔드는 발언을 대놓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자신이 트럼프 그룹 회당에서 규모가 큰 주식회사 미국의 최고경영자(CEO)로 옮긴 것으로 착각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예루살렘에선 이스라엘 손 들어줘

게다가 지난달 22일 이스라엘을 찾은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측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통곡의 벽’을 찾았다. 이곳은 딱 50년 전인 1967년 6월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한 곳이다. 과거 솔로몬의 성전이 섰다가 벽만 남기고 사라진 자리인데 그 위에는 이슬람의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트럼프는 이곳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했으며 이에 따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동행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 자격이라도 그가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게다가 그는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고 현재 텔아비브에 있는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고 대선 과정에서 공약했다. 지난해 9월 미국을 찾은 네타냐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다. 예루살렘을 분쟁 지역으로 인식하고 영유권 문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오바마를 비롯한 기존 미국 지도자들의 정책과 배치된다.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이 이스라엘에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 이슬람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제사회도 이스라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동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트럼프는 귀국 뒤 대사관 이전을 6개월 유예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 의회는 조지 부시 대통령 당시인 95년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의결했지만 국익을 고려해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이를 6개월씩 보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영유권 인정 문제는 일단 유예되긴 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으로 남게 됐다.

포퓰리즘이 뒤흔든 국제정치

트럼프는 미국 내에서도 전통적인 가치에 도전해 왔다. 언론을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대중의 적’으로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타인의 지식과 신념에 대해서도 자신의 목적과 주장에 맞지 않으면 거침없이 ‘페이크뉴스’ 딱지를 붙이며 거부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도 의심하고 음모론을 신봉하는 일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후변화를 사기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관점과 자신의 지지자를 위해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했다는 사실은 트럼프 개인은 물론 미국이라는 국가, 그리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회의가 확산할 수밖에 없다. 파리가 아닌 피츠버그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포퓰리스트 한 명이 인류 문명사의 흐름에서 미국을 낙마시키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이는 이유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정부는 탈퇴해도 미국인은 협약 지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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