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문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어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최근 한·미 관계가 자유무역협정과 무기체계에 국한된 근시안적인 차원으로 축소됐다. 다음달 개최될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한·미 관계를 모든 차원에서 발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큰 틀의 시도를 위한 구상이 없다면 한·미 정상회담을 연기시키는 게 낫다.

방미단에 총장·연구소장 포함시켜 #한·미 과학기술 협력 증진하고 #트럼프 ‘미국 우선주의’ 역이용해 #한국의 비전과 국가 이익 추구해야

미국은 지금 엄청난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있다. 실현 가능한 것들을 제시하는 강력한 비전은 한국이 준비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여력이 없다.

문 대통령은 획기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 예컨대 그는 방미 수행단에 주요 대학 총장과 연구소 소장들을 포함해야 한다. 한·미 과학기술 협력을 대폭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한국은 국제협력 분야에서 심각하게 뒤처져 있지만 이 문제가 부각된 적이 없다. 만약 한국을 학술 협력의 선도국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문 대통령이 선언한다면 그는 기존의 지지기반을 훨씬 뛰어넘는 합의와 지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과학 발전과 국제협력을 통한 체계적인 기후변화 대응에 한국이 헌신하겠다고 미국에서 선언해야 한다. 많은 미국인에게 깊은 관심사인 기후변화에 대해 문 대통령이 “미국 없이 더 강력한 협력을 위해 ‘서울협약’을 위한 긴급 총회를 열자”고 하면 크게 환영받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 하버드대·국방부까지 미국 전역에서 의외의 우군을 얻게 될 것이다.

문 대통령은 가능한 한 오래 미국에 머물러야 하는데 체류지가 워싱턴DC로 제한되면 안 된다. 트럼프의 당선 이래 권력이 미국 전역으로 분산되고 있다. 워싱턴의 엘리트층 외에도 문 대통령이 만나야 할 주요 인물이 많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캘리포니아에 들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적·제도적 강점을 활용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한국의 제안에 훨씬 더 개방적일 것이다. 하와이에 있는 미 태평양사령부(USPACOM)를 방문하는 것도 적절하다. 미국에서 가장 냉철한 전략사상가들이 그곳에 있다. 그들은 중국을 파트너로 삼아 동북아에서 평화적인 질서를 수립하려는 한국의 희망을 이해한다.

문 대통령은 방미를 즈음해 국내에서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감을 갖고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탄핵에 이은 선거에서 당선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부러워하는 정당성 있는 민주주의 리더십을 확보했다. 카드를 잘 쓰면 한국은 남북통일과 동북아 통합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안하고 구현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문제의 처리를 그의 측근이나 가족에게 넘기려 한다고 해도 문 대통령은 트럼프 행정부와 상호작용할 때 항상 원칙을 지켜야 한다. 상상력을 총동원해 영감을 주는 제안과 철저한 실행 계획을 작성해야 한다.

미국이 극심한 정치적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해 청와대와 외교부는 매우 신중하게 이번 방미를 준비해야 한다. 준비는 미 고위 관료들과 미팅을 하기 위해 간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의 미국을 구성하는 모든 경쟁 그룹들을 깊게 이해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나 대통령 집무실 바깥에 있는 유력인들이 존중하게 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에 대해 물어본다면, 문 대통령은 한국이 종합적인 솔루션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난 행정부에서 발생한 절차상의 문제들 때문에 일이 늦어지고 있다고 알려줘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문 대통령은 동북아에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놀라운 ‘거래(deal)’ 구상을 설명해야 한다. 평양에 트럼프타워를 짓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외교적인 전술로 모면할 수 없는 고위험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대비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과 방미 준비팀은 굴욕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 준비팀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수사를 활용해 한국의 국익을 증진시킬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 핵심은 트럼프 대통령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게 아니다. 한국 측의 비전 있는 정책이 트럼프의 단기적인 목표와 부합된다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이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보통 미국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의 오랜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많은 보통 미국 사람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한 연설은 문 대통령이 답답한 백악관 연회실에서 달성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효과를 낳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제적인 입지를 다진 것은 미국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서가 아니다. 아시아의 전통에도 민주주의가 내재됐다는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기고문을 통해서였다. 어쩌면 문재인 대통령 또한 깊은 사상이 담긴 기고문을 쓰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