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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강을 건너면 뗏목은 버린다 … 칼 보다 말을 믿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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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성공하는 정권의 7가지 법칙 

성공한 권력의 특징은 뭘까. 1987년 민주화 이래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7명의 대통령 행보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정권의 7가지 법칙’을 도출했다. 정권 가치(Value)를 높이는 7가지 변수는 대통령이 구사하는 언어(Language)·인사(Personnel)·비용(Cost)·시간(Time)·위험(Risk management)·사명(Mission)·전략(Strategy)이다. 함수식으론 v =f (L, P, C, T, R, M, S).

노무현 원작이면 문재인은 속편? #코드 인사 넘어 운동장 넓게 사용 #좌우 시한폭탄 노조·여의도 정치 #“개혁은 힘 있을 때 전광석화처럼” #국방부 적폐 몰다 판도라 상자 될라 #문 대통령, 선거 때 “형님” 외친 까닭

5년 단임제 헌법체제(민주화 시대) 30년 동안 한국의 정치는 불균형하게 발전했다. 정권을 잡기 위한 실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통치에 성공하는 실력은 제 자리를 맴돌고 있다. 권력을 쥐는 데 능할 뿐 권력을 쓰는 데 무능했다. 노태우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화려한 집권, 비극적 종말이라는 패턴이 반복됐다. 집권(執權) 유능, 용권(用權·권력사용) 무능의 불균형 정치는 마치 돈은 잘 버는 데 사는 건 늘 허덕이는 파탄적 집안을 연상시킨다. 권력을 잘 사용하는 노하우는 없을까. 집권 세력이 정권을 잘 유지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단임제 정권이 임기 말까지 성공하기 위해 갖춰야 할 매뉴얼을 만들 순 없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앞의 전영기 칼럼니스트.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앞의 전영기 칼럼니스트.

이런 중에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을 취재하기 위해 경남 진영의 허름한 모텔에서 하루 묵었다. 홀로 머문 1박 2일은 모처럼 내게 '단절의 효과'를 주었다. 단절은 종종 창조의 조건을 제공한다. 1987년 이래 자유 경쟁으로 권력의 자리에 오른 6명 대통령의 통치 실패 요인을 요모조모 따져 봤다. 여기에 행사 당일 밀물처럼 몰려든 노란 물결의 피플 파워, 부엉이바위 아래서 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사, 현장서 만난 노무현·문재인 시대의 사람들과 인터뷰 내용을 섞었다. 이렇게 해서 '성공하는 정권의 7가지 법칙'이 시험적으로 도출됐다.

정권의 성공은 권력의 가치(Value)가 높은 상태라고 봤다. 권력의 가치를 높이는 7가지 변수를 추출했더니 다음과 같았다. 대통령이 구사하는 언어(Language)·인사(Personnel)·비용(Cost)·시간(Time)·위험(Risk management)·사명(Mission)·전략(Strategy)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정권의 가치 V는 7가지 변수의 함수(Function)"가 될 것이다. 함수식으론 V=F(L,P,C,T,R,M,S)이다.

(1)국민 마음 흔든 감동의 언어  
노무현이 원작이라면 문재인은 속편이다? 문재인의 집권을 반대한 많은 사람들에겐 이런 통념이 있었다. 노무현 시대의 선악 정치, 편 가르기, 과잉 이상(理想)이 그의 친구이자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정권에서도 비슷하게 펼쳐지리라는 우려가 컸다. '원작 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이른바 소포모어(sophomore) 징크스다. 이런 통념은 취임 20일만에 금이 가고 있다.

선거 결과 41% 득표율을 얻은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을 넘어 역대 최고의 국정 지지율 87%(한국갤럽 5월16~18일 조사, 기존 최고 기록은 김영삼 대통령 때 85%)를 경신했다. 문 대통령이 제작한 영화는 노무현 속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독립영화일지 모른다. 노무현을 뛰어 넘는 문재인, 그 가능성을 증명한 첫번 째 도구는 문재인의 언어다.

5월10일의 취임사와 겸손하고 친근한 언행이 반전의 방아쇠였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도 섬기겠다."

노무현의 어법과 비교하면 불처럼 타오르기 보다 물같이 잔잔하고, 햇볕같이 강렬하기 보다 달빛처럼 적시고, 진영의 공격성을 드러내기 보다 국민 통합의 상식에 호소했다. 5월23일 봉하마을 추도식 인사말의 마지막 대목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서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을 가슴에만 간직하겠다." 친노·친문의 정파적 지도자에서 일국의 통치자, 국가 지도자로서 전체를 보겠다는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는 법. 말 위에선 천하를 지배할 수 없다. 선거 때 휘두르던 칼은 버려야 한다. 대통령은 스스로 국민 마음을 흔드는 메시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봉하마을 입구에 걸린 플래카드.

봉하마을 입구에 걸린 플래카드.

문 대통령의 변신은 '말로 하는 언어(Verbal language)'에서 그치지 않는다. 표정이나 몸짓·자세·스타일같은 '말 아닌 언어(Non-verbal language)'에서도 통합성이 뚜렷하다. 지지자를 위한 정치에서 반대자까지 생각하는 통치로 나아가겠다는 메시지다.

봉하마을에서 만난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연설에 칭찬이 쏟아 지지만 이게 정말 명연설이 되려면 실행이 되어야 한다. 문재인 언어의 힘은 실천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윤 전 대변인은 문 대통령의 취임사 초안을 작성한 주인공이다. 정치의 유력한 수단은 메시지다. 좋은 언어는 형벌·무기·재정·감시같이 다른 권력 수단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높은 통치 효과를 내는 마법과 같다. 단, 실천이 따르지 않은 메시지는 공허하고 상황을 모면하는 언어가 남발되면 식상한다. 지지율은 바로 떨어질 것이다.

(2)'양정철 희생' 인사를 자유롭게
문재인식 인사는 가깝다고 중용하지 않고 멀다고 배척하지 않는다. '범진보 코드'와 '탕평 발탁' '전문가 중시'가 두드러 진다. 문 대통령의 선수 운영은 노무현식 코드 인사나 배타적인 친문 코드를 뛰어 넘는다. 운동장을 넓게 쓰는 인사다. 안철수 진영 소속이었던 장하성을 청와대 정책실장에 앉히고 대통령 내외의 생활자금까지 챙기는 총무 비서관을 예산 관료로 충원했다. 현직 도지사이자 손학규계로 분류된 이낙연의 총리 합류는 호남을 통째로 끌어 안겠다는 대담한 발상이었다.

운동장을 넓게 쓰는 인사가 가능했던 건 대통령의 측근 중 측근, 핵심 중 핵심으로 통하는 양정철의 퇴장이다. 양정철의 후퇴로 넓어진 물리적·심리적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참여가가 이뤄졌다. 그의 희생으로 인사의 자유도가 높아진 셈이다. 양정철은 이호철·전해철·노영민·김경수·소문상·윤건영 등과 함께 비상 프로그램인 '취임 100일 계획'을 짠 중심 인물이다. 이 가운데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빼고 모두 새 정부의 중심 자리에서 비껴있거나 무대 전면에서 내려왔다. 문 대통령이 이들에 대한 부담을 털고 인사의 폭과 선택에서 여유를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양정철은 5월15일 청와대 관저에서 문 대통령과 고별 만찬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김경수 의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양 선배(양정철)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가든 측근·패권 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니 '대통령 곁을 떠나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그렇다면 청와대 바깥에서 공직을 맡으라'고 권유했지만 양 선배가 끝까지 버텼다. 결국 대통령이 '어쩔 수 없네. 나중에 어려워지면 도와달라'고 결별을 허락했다."

김 의원은 이호철·양정철의 극적인 퇴장이 '정권엔 도움 안되고 자리 욕심만 있는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을 뒤로 물리치는 효과를 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으로 하여금 『운명』(2011년),『1219 끝이 시작이다』(2013년)라는 저술을 유도해 운명적인 1차 대선 출마, 능동적인 권력의지가 장착된 2차 대선 출마를 하게 하고 집권의 정점에서 홀연히 사라진 양정철의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김경수 의원의 이어지는 설명.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에겐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보다 더 한 충격이었다. 인생의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일 크게 울었던 게 영화 '광해'를 보면서였다. 그 때 내가 '왜 그렇게 우셨느냐'고 여쭤 봤다. 문 대통령은 도승지 류승룡이 가짜 광해 이병헌과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서 '저 사람들도 하는 작별 인사를 나는 (노무현)대통령님한테 못하지 않았느냐'고 또 울더라. 이호철 선배나 양 선배나 나나 성공한 대통령을 만드는 것 보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건 없다. 양정철이 국민 속에서 잊혀질 권리를 선택한 것도 노 대통령에 대한 회한, 문 대통령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본다."

(3)정권의 시한폭탄 '비용 문제'   

재정 펑크,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문재인 정부 최대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모든 잘 나가는 것엔 돈을 포함해 물질적 비용이 청구되기 마련이다. 감동 언어(L), 좋은 인사(P), 시간(T) 관리, 위기(R) 예방, 사명(M) 의식,전략(S) 구사 등 정권 성공을 위한 다른 비물질적 6대 요소가 중요한 이유는 그런 것들이 잘 작동돼야 국민이 지불할 비용(C)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정책 비전 사령탑인 국정자문위는 지난 주 3~5세 무상보육 예산 4조원을 전액 정부 재정에서 부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재원 대책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400조원 규모의 나라 살림을 운영하면서 10억원짜리 소규모 사업도 꼼꼼히 검토하는 기획재정부가 크게 당황하고 비상이 걸린 건 말할 것도 없다. 아동수당·기초연금·사병월급 인상에 공무원 채용, 쌀 직불금 확대 등 문재인 정부 5년간 공약 이행을 위해 드는 재정이 178조원이다.

이 돈을 충족하려면 매년 예산 증가율이 7%여야 하는데 최근 10년간 예산 평균 증가율은 5%다. 한 두 해도 아니고 5년 내내 이 기적같은 재정 증가율이 가능할까. 보수 정부가 진보 정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흙수저 출신 유능한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출현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일까. 결국 억지 증가를 밀어 붙이다가 국가 채무, 적자 재정으로 텅 빈 국고(國庫)만 다음 정부에 넘겨주고 물러나는 건 아닌가. 그리스·베네수엘라가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 나라의 교훈만큼은 이웃 나라로 여겨야 할 것이다.

(4)시간, 전광석화 속도 개혁
서울중앙지검장에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을 발탁한 깜짝 인사는 취임 아흐레만에(우선 순위), 전임자가 사의를 표명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타이밍), 연수원 기수 5기를 뛰어 넘어(임팩트) 이뤄졌다. 우선 순위와 타이밍·임팩트는 정권 시간 관리의 3대 요소다. 정권의 미션은 순서·타이밍·임팩트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매끄럽게 성공하기도 하고 뒤죽박죽 헝크러지기도 한다.

1993년 취임 열하루만에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순식간에 경질한 뒤 4시간만에 후임자를 임명한 김영삼(YS) 대통령의 하나회(정치군인 사조직) 척결을 모델로 삼은 듯하다. YS는 당시 김종필 집권당 대표에게 "후임자를 청와대로 바로 불러 임명장을 주고는 서둘러 들어가 부대를 장악하라고 명령했어요. 만일의 경우 하나회 세력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조치였다"고 설명했다(『김종필 증언록』2권,190쪽).

김경수 의원은 "검찰 개혁과 같은 정권의 핵심 과제는 힘이 있는 집권 초기에 신속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게 참여정부 출신 인사 대부분의 생각"이라고 했다. 검찰 개혁의 초점을 당사자 설득과 시스템 개조에 맞췄던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에서 배운 교훈이다. 노무현 시대의 시행착오를 통해 정권의 사활을 건 개혁 작업엔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약점을 파고 들어 사람을 치는 인적 청산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집권세력의 핵심들 사이에 깔려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정부의 위기는 정책의 앞뒤 순서와 속도 조절이 실패하면 발생할 것이다. 한반도 주변의 긴장과 충돌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남북 당국간 대화와 대북 유화조치를 물색없이 앞세운다든가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질주하는 경우 국내외 마찰과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위대한 힘을 믿고 시간 안에서 한발짝씩 상황을 만들면서 조건이 성숙되길 기다릴 필요가 있다.

(5)위기 관리…핸들 잘 잡아라
문재인 정부의 앞길엔 왼쪽 벼랑과 오른쪽 산악이 있다. 양 방향 위험에 부딪치지 않으려면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한다. 정권의 핸들을 헐겁게 잡아서도, 어깨에 힘을 주어서도 안된다. 정권의 주주를 자처하는 민노총·전교조·전국공무원노조 등의 노조 정치에 굴복하면 문재인 정부는 좌편향의 벼랑으로 떨어질 것이다.

전교조는 "모두가 침묵할 때 용기있는 항의가 없었다면 촛불혁명, 조기 대선, 새 정부 수립이 불가능했다. 빚진 과거를 잊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18일 성명)라며 법외노조 통보의 철회를 요구했다. 전교조는 2003년에도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파동을 일으켜 이를 조정하던 문재인 민정수석을 코너로 몰아 넣었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참여정부 초기 그 중요한 시기에 교육부나 전교조는 그 문제에 발목이 잡혀 한발 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문재인 정부의 또 다른 위험은 국회 즉, 당정 관계와 야당 관리에서 발생할 수 있다. 어깨에 힘 주다간 입법부의 극한 저항을 맞게 될 것이다. 우편향으로 산악에 충돌하는 형국이다. 여의도 정치의 실패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권까지 진보·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는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과정에서 김종필(JP)의 절대적 도움을 받았으나 통치 과정에서 JP 세력을 배제함으로써 권력 기반의 붕괴를 자초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 분리의 이상적 원칙에 집착해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안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을 청와대에 종속시키려고 노심초사하다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당·정 관계의 안정적 유지와 함께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는 대야 관계. 과반 의석에서 30석 모자라는 120석의 소수 여당만으론 국무총리나 장관 임명, 정부조직법 통과같은 최소한의 정부 구성이나 추경안·예산안 처리같은 일상적 정부 활동조차 유지하기 버겁다. 하물며 사드 비준같이 논란 많은 안건이나 재벌·검찰·일자리 구조를 바꾸는 개혁 법안은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진 않지만 타협을 두려워 하지 않겠다"(케네디 대통령)는 예술적인 균형 감각이 없다면 어떻게 손을 대겠나.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자면 목표를 놓치지 않는 네비게이션 운용(사명), 능수능란한 핸들 조작(위기), 감당할만한 속도로 브레이크 밟기(시간), 충분하게 채워져 있는 연료통(비용)과 든든한 엔진 추진력(언어), 믿음직한 사람들로 채워진 조수석(인사)이 정권 성공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6)밤 하늘의 북극성같은 사명
봉하마을 추도식에서 문재인의 연설은 작고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보고이자 지지·반대자를 포괄해 모든 국민을 향한 선언이었다. 거기서 개혁은 수단이고 목표는 국민통합이라는 게 정식화(定式化)되었다.

"개혁도, 저 문재인의 신념이기 때문에 또 옳은 길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눈을 맞추면서 나가겠다. 국민이 앞서 가면 더 속도를 내고 국민이 늦추면 소통하면서 설득하겠다."

집권 전 신념의 정치를 추구했던 문재인은 대통령이 된 뒤 책임의 정치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재벌 개혁'이란 말을 한 번 사용했다. 정권의 목표나 국정 지향점으로서 개혁이란 단어는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대신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19대 대통령으로서 책임과 소명을 다하겠다" "감히 약속드린다. 이날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되는 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한다"며 국민·통합·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취임후 지금까지 개혁을 위한 개혁이 아니라 통합을 위한 개혁을 집중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밤 하늘엔 북극성을 중심으로 여러 별들이 흩어져 있다. 칸트는 "저 하늘엔 별이, 내 가슴엔 양심이 반짝인다"고 했다. 문재인의 가슴엔 국민통합이라는 사명(Mission)이 별처럼 박혀 있다. 그런데 통상 정권이 위기에 처하면 국민을 편가르고, 보수와 진보를 나누고, 희생양 집단을 만들어 가마솥같이 끓는 분노와 공격성을 돌리려는 유혹에 빠지곤 한다.

개혁은 통합을 위한 수단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개혁이 책임질 수 없으며 관리불가능한 판도라 상자 열기로 치달아선 곤란하다. 요즘 대통령과 청와대가 '사드 발사대 4기 반입' 보고 누락을 빌미로 국방부를 무슨 적폐의 온상처럼 밀어붙이고 있는데 이건 위험하다. 한발짝만 넘어서면 정권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희생양 찿기에 빠져들었다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문 대통령의 그림자 전령사 역할을 하는 황희 의원은 "적폐 청산의 적(積)은 쌓을 적이지 대항할 적(敵)이 아니다. 오랫동안 쌓인 불공정한 문화와 정책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인적 청산은 애초부터 우리의 개념에 없다"라고 했다. 정권 교체를 캠프 바깥에서 도운 사람들 가운데 'MB를 법정으로!'같이 과격하고 급진적인 요구를 하는 집단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합리적 법률가인 문 대통령이 거기에 영향받거나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통합을 위한 개혁'과 '개혁을 위한 개혁'의 차이는 법과 절차·상식·국민의식의 변화 속도를 존중하느냐에 달려 있다.

(7)전략의 요체 '꿩 잡는 게 매'  
성공하는 정권의 7가지 법칙 가운데 마지막 요소인 전략은 앞의 6가지 요소들을 배합하는 기술이다. 5년 임기 전체를 관통하는 혹은 임기 초·중·말기의 국면적 특징, 아니면 그때그때 지배적 사건이 무엇인지를 직관이나 통찰로 파악하는 게 요체다. 그런 뒤 언어·인사·비용·시간·위기(관리)·사명 중 어떤 것을 최전방에 세우고 어떤 것들을 미들필드나 스위퍼로 배치해 상황을 돌파할 지 결정하는게 전략이다. 이를 한 마디로 얘기하면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글로벌 불공정 시대에 전략적 리더십은 목표지향적, 문제해결형 리더십이다. 이념이나 냉전형, 카리스마나 일방지시형 리더십은 전략적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

전략적 리더십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굴신이나 변화를 마다않는 유연성이 있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정운찬 전 총리의 지원을 받기 위해 그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방배동 음식점을 기습했다고 한다. 문 후보는 정 전 총리에게 "형님, 저 좀 도와달라. 제가 집권하면 형님의 동반성장 전략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간절히 요청했다. 이 모습을 지켜 보던 김창영 전 총리실 공보실장은 "그 점잖고 숫기없는 문 후보 입에서 '형님' 소리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놀라워 했다. 김 전 실장은 "집권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존심이나 스타일을 버릴 수 있는 게 4년 전과 달라진 문재인의 모습"이라고 했다. 하늘 높은 곳을 멋지게 날아 다녀도 꿩을 잡지 못하면 그게 무슨 매일까. 보잘 것 없이 보여도 꿩을 잡으면 그게 다 매다. 꿩 잡는 게 매. 전략은 정권 성공이라는 꿩을 잡기 위해 대통령이 펼치는 '가능성의 예술(Art of possibility)'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