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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傳(9)]'오뚝이' 박봉주 총리

중앙일보

입력

북한의 10대 총리는 박봉주 현 총리다. 박봉주는 강성산(1931~2007)과 함께 총리를 두 번씩이나 한다. 첫 번째는 2003~2007년이고, 두 번째는 2013년부터 현재까지다. 두 번 모두 합치면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된다. 올해 78세다.

총리를 두 차례 역임한 역대 최장수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빽없는 '흙수저' #2002년 경제시찰단으로 서울 방문 #'7·1조치 '의 주역으로 총리에 올라 #장성택 배신으로 정치국 상무위원 승진 #'경제·핵' 병진 노선의 선봉장으로 승승장구

박봉주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오뚝이’ ‘경제개혁파’ 등이다. 그의 삶을 보면 이런 수식어가 바로 연상된다. 박봉주는 북한 고위 관료들이 다니는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등 명문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낯선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공업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김일성 일가와 연고도 없는 ‘흙수저’였다.

박봉주 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가 2015년 6월 24일 리모델링한 평양국제비행장(순안공항) 항공역사를 현지지도를 하는 김정은의 지시사항을 듣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박봉주 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가 2015년 6월 24일 리모델링한 평양국제비행장(순안공항) 항공역사를 현지지도를 하는 김정은의 지시사항을 듣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그는 소위 ‘깡’ 하나로 총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직장생활은 1962년 평북용천식료공장 지배인부터 시작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83년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책임비서로 옮겨 10년 동안 근무했다.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는 평안남도 안주시에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석유화학공장이다. 그 공로로 93년 당 경공업부 부부장으로 발탁됐다.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98년 내각 화학공업상으로 기용된 박봉주는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장성택 등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삼성전자와 포항제철 등을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의 두타타워를 방문했을 때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박봉주는 상인들에게 열심히 질문했다.

이를 지켜 본 기자들이 박봉주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지금 볼 게 많은데 눈이 두 개뿐이요. 말 좀 걸지 마세요”라고 대답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김정일은 2000년과 2001년 중국 방문을 통해 중국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고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급여 인상·배급 제도의 변화·환율의 현실화·기업 소 책임경영 강화 등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봉주가 이 조치를 입안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7·1조치’의 추가 방안으로 금융제도와 상품유통 체계에 시장경제 요소를 가미하려고 했다. 또한 국가개발은행 설립도 추진했다. 하지만 2005년부터 한국 상품이 종합시장에서 팔리는 등 이른바 ‘황색바람(자본주의 풍조)’이 불어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박봉주는 2006년부터 ‘식물 총리’로 전락했다. 2007년 4월 실각한 박봉주는 평안남도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하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3년 4개월만인 2010년 8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2년 뒤 당 경공업부장을 맡았고 2013년 4월 다시 총리가 됐다. 그리고 총리가 되기 하루 전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정치국 위원이 됐다. 후보위원을 건너뛰고 바로 정위원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박봉주에게 상당한 힘이 실리게 됐다.

박봉주는 농촌과 공장, 건설 현장 등을 다니며 현장을 독려했다.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김정일 시대와 달리 그의 현장 시찰을 언론에 보도했다. 김정일 시대는 총리의 현장 시찰은 언론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김정은이 박봉주에게 많은 권한을 줄테니 책임도 져라는 시그널이었다.

노동신문은 2013년 12월 8일 박봉주 총리가 국가과학원을 방문한 것을 3면에 실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총리의 현장 시찰을 언론에 공개하게 했다. [사진 노동신문]

노동신문은 2013년 12월 8일 박봉주 총리가 국가과학원을 방문한 것을 3면에 실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총리의 현장 시찰을 언론에 공개하게 했다. [사진 노동신문]

박봉주가 이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장성택이다. 장성택이 2003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강력 추천해 총리로 앉혔다. 그리고 장성택은 2013년 당 행정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다시 총리로 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개혁·개방에 긍정적이었던 장성택과 박봉주는 코드가 절묘하게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장성택이 처형되는 과정에서 박봉주는 장성택의 편이 돼 주지 못했다. 서슬퍼런 칼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박봉주는 ‘장성택의 성토장’이 됐던 2013년 12월 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장성택을 비판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2013년 12월 9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한 소식을 전하며 박봉주 내각 총리가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비판하는 화면을 내보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북한 조선중앙TV는 2013년 12월 9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한 소식을 전하며 박봉주 내각 총리가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비판하는 화면을 내보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장성택을 비판한 뒤 박봉주는 김정은으로부터 확실한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5월 노동당 제7차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정치국 서열 4위다. 총리가 재임시절에 정치국 상무위원을 겸한 것은 이종옥과 박봉주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직책보다 정치국 서열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박봉주는 역대 다른 총리들보다 힘을 갖게 됐다. 아울러 그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도 됐다. 총리가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 같은 인사는 김정은이 2013년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분석할 수 있다.

북한은 비로소 중국처럼 총리가 힘을 갖고 경제성장의 임무를 맡게 됐다. 중국은 리커창 총리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서열 2위이며, 앞선 원자바오 총리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서열 3위였다. 총리가 이 정도 돼야 경제를 제대로 맡을 수 있는 것이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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