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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구글 맞선다며 만든 ‘한국 AI’ … 정부, 750억 지원 약속 버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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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해 3월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국 이후 한국 사회엔 ‘AI 광풍’이 불었다. AI 개발에 뒤처진 현실을 개탄하며 공공·민간 가릴 것 없이 그 바람에 편승했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성남 판교테크노밸리에 들어선 AI 연구소 ‘지능정보기술연구원’(AIRI)도 그런 광풍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설립 8개월여 만에 AIRI는 한국 AI 연구개발(R&D)의 허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됐다. 세계 바둑랭킹 1위인 중국의 커제 9단마저 꺾은 알파고는 더는 적수가 없다며 바둑계에서 은퇴할 정도로 성장했는데, 야심 차게 출범한 AIRI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과학계 관계자는 “AIRI는 미래창조과학부가 낳은 사생아”라고 말했다. 미래부는 구글 등에 대응해 한국도 자체 AI 플랫폼을 개발해 보자며 AIRI 설립을 기획했다. 하지만 관 주도란 인식을 벗기 위해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 주식회사 형태의 연구소로 만들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7개 대기업이 각각 30억원씩을 추렴해 총 210억원의 자본금을 만들었다. 애초 미래부는 AIRI가 설립되면 750억원에 달하는 국가 AI 연구개발 자금을 AIRI에 맡길 계획이었다.

위기의 국내 AI 연구 #미래부 주도로 만든 AI연구소 #최순실 사태 터지자 방치 #정치권도 여론 편승 비판만

하지만 ‘최순실 스캔들’이 터지면서 ‘AIRI가 또 다른 형태의 K스포츠·미르재단이 아니냐’는 비판이 정치권에서 쏟아졌다. 주식회사 형태의 민간 연구소에 경쟁 없이 국가 R&D를 맡기는 것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때문에 AIRI는 지난해 12월 미래부가 공모한 연구개발 과제 ‘자율지능 디지털 동반자 기술연구’에서 탈락했다. 미래부는 이후 정부가 주도해 AIRI 설립자금을 모았다는 사실조차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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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I는 연구인력 구성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애초 출연금을 낸 기업에서 AI 연구진을 파견받기로 했으나 기업들이 난색을 표해 자체 인력을 구해야 했다. 이 때문에 현재 목표 인원의 절반인 20명의 연구원을 겨우 모은 상태다. 여론이 나빠지니 지원자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20명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AI 연구를 하지 않았던 연구원들이라 입사 이후 세미나 등을 통한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인간 퀴즈왕' 이긴 '국내 AI' 엑소브레인, 정보보호 규제 막혀 질병 진단은 포기

김진형(68) AIRI 원장은 “애초 정부의 말을 믿고 추진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참담한 심정”이라며 “이사회 승인을 받아 자본금 210억원 중 50억원을 운영·연구자금으로 쓰면서 연구원의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국내 인공지능 분야 1세대 연구자로, 1987년 KAIST에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연구센터를 만든 인물이다.

국내 대표적 정보기술(IT) 분야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AI 개발 사업도 삐걱거리고 있다. ETRI는 2013년 인간 퀴즈왕을 이긴 미국 IBM의 왓슨을 롤모델로 2023년까지 글로벌 톱 수준의 언어 인공지능인 ‘엑소브레인(Exo-brain)’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엑소브레인은 지난해 말 국내 인간 ‘퀴즈왕’들과의 퀴즈쇼에서 승리하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 3월 시작한 2단계부터 문제가 생겼다. 애초 1단계 연구를 기반으로 의료·법률 부문의 전문지식 QA시스템을 갖춘 응용기술을 개발할 예정이었으나 의료 부문은 포기했다. 각 병원이 보유한 환자진료 빅데이터를 분석해 질병 진단에 도움을 주는 서비스를 하고 싶었지만 국내의 엄격한 정보보호 규제 때문에 데이터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ETRI는 의료 분야 대신 공개된 특허 데이터베이스(DB)를 활용한 AI 특허 정보 서비스를 하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수영 KAIST 인공지능연구센터 소장은 “지난 1년간 한국 사회에 AI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관련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데다 연구인력까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라며 “정부는 산학연이 유기적으로 공동연구를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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