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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영정사진 무료 봉사하는 김광안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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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공원에서 무료 영정사진촬영 봉사를 해온 김광안씨가 '천인보(千人譜)-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 마무리를 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종묘공원에서 무료 영정사진촬영 봉사를 해온 김광안씨가 '천인보(千人譜)-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 마무리를 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사진이라는 게 원래 기억과 밀접하지만 영정사진은 특히 그렇죠. ‘나는 이런 사람이라오, 이보시오들 나를 잊지 말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진이지요.”

김광안(80)씨가 책상 가득 펼쳐 놓고 정성스레 매만지고 있는 건 1000장의 얼굴사진, 정확히는 노인들의 영정사진이다. 김씨는 5월 31일부터 6월 6일까지 서울 관훈동 갤러리 나우에서 열릴 ‘천인보(千人譜)-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 막바지 준비 중이다.

김씨가 종묘공원에서 무료 영정사진촬영 봉사를 시작한 것은 2014년 9월부터다. 1965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은행·종합상사를 거쳐 건설업계에 몸담은 김씨는 대림산업 중동 지점장(지사장)을 거쳐 본사 이사직을 마치고 20여 년 전 은퇴했다. 10년 간 작은 기업을 운영했고, 이후부터는 사진에 푹 빠졌다. 외국생활을 오래 하면서 사 두었던 카메라가 노년의 좋은 벗이 됐다. “뭘 찍을까 고민이 많았죠. 달력사진처럼 그냥 예쁜 사진은 싫고, 나만의 기록물을 만들고 싶었어요. 겁도 없이 섬진강을 찍겠다고 4년을 매달렸는데 이게 참 순진한 생각이었죠. 문득 내 사진을 들여다보니 그저 강만 보이더란 말입니다. 강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문화가 어우러져야 진짜 섬진강의 모습인 걸 늦게 깨닫고 그만뒀죠.”

우연히 종묘공원 앞을 지나다 그는 ‘사진 봉사’를 떠올렸다. “사회와 가정에서 ‘더 이상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밀려난 노인들이 차비와 몇 천 원짜리 밥·술값으로 온종일을 보내는 곳이죠. 이분들에게 영정사진을 선물하자 결심했죠.”

'천인보-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에 전시될 작품. [사진 김광안]

'천인보-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에 전시될 작품. [사진 김광안]

공원 주차관리건물 계단 한 구석에 카메라 한 대, 삼각대 하나, 낚시 의자 한 개를 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부인 박영자(76)씨가 밖에서 번호표를 나눠주면, 노인들이 순서대로 김씨의 카메라 앞에 섰다. 부부는 이렇게 하루에 10~20명씩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가로 27cm, 세로 35cm 액자에 담아 공짜로 선물했다. 인화비용에 액자까지 무슨 수로 다 감당했나, 물었더니 친구들과 가족이 많은 도움을 줬단다. 여기서 여담 한 토막. 김씨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고 모두 국내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중 맏아들이 2010년 한국인 최초로 과학 분야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하버드대 김필립 교수다.

“공짜니까 여러 번 와서 찍는 사람도 있었어요. ‘어제는 넥타이를 안 매고 왔다’ ‘머리 염색을 새로 했다’ 등등 핑계도 다양했죠. 생의 마지막 모습이라 생각하니 신경이 쓰였던 게죠.”

사진액자를 안 찾아가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이때는 받아놓은 휴대폰 번호로 서너 번씩 문자를 보내는데 한 번은 ‘상계동 지하철역까지 갖다 주면 안 되겠냐’는 문자를 받았다. “사진 찍어주고 배달까지 해야 하나 괘씸한 생각도 들었지만 봉사하자 한 거니 두 말 없이 갔죠. 그분 사연을 들어보니 내가 사진 봉사하러 종묘공원에 오는 화·금요일과 빌딩관리 당직일이 겹쳐서 나올 수 없었다더군요. 부탁할 만한 식구도 없고. 갖다 주길 잘 했다 싶었죠.”

종묘공원에서 영정사진용으로 촬영한 1000명의 노인 초상으로 '천인보(千人譜)-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전시회를 갤러리 나우에서 5월31일~6월6일까지 여는 사진가 김광안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대림건설 이사까지 지낸 김광안씨는 은퇴 후 사진을 배워 이번 작업까지 하게 됐다. 201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과학 분야 후보에 오른 물리학자 김필립 박사가 그의 장남이다. 신인섭 기자

종묘공원에서 영정사진용으로 촬영한 1000명의 노인 초상으로 '천인보(千人譜)-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전시회를 갤러리 나우에서 5월31일~6월6일까지 여는 사진가 김광안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대림건설 이사까지 지낸 김광안씨는 은퇴 후 사진을 배워 이번 작업까지 하게 됐다. 201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과학 분야 후보에 오른 물리학자 김필립 박사가 그의 장남이다. 신인섭 기자

1년 넘게 1주일에 두 번씩 무거운 카메라 장비와 액자들을 들고 나르다 보니 몇 차례 수술한 바 있는 허리·다리에 무리가 왔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김씨는 영정사진 봉사를 잠시 접고 사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천인보-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이다. “영정사진, 즉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정직한 얼굴이라고 생각해요. 노년의 생활형편이나 마음고생 때문에 무미건조하고 우울한 표정도 있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의 가면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김씨는 특히 종묘공원에서 만난 1000명의 노인들의 얼굴은 고령화시대로 접어든 우리시대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다. “종묘공원 성역화 사업으로 조만간 이 공간에서도 밀려나면 뿔뿔이 흩어지겠죠. 탑골공원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온 것처럼. 이들의 이야기는 서울 ‘종로’라는 공간의 흔적이자 2017년을 살아가는 취약계층 노인들의 실상인 거죠.” 김씨는 천인보를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영구소장 기록물로 신청했고 지난 3월 그 제안이 채택됐다. 김씨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났다”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무명인(無名人)들의 이야기를 작은 기록으로라도 남기게 돼서 뿌듯하다”고 했다.

'천인보-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 포스터

'천인보-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 포스터

‘천인보-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사진전은 소수의 관람객들과 정서적으로 좀 더 가까이 만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1000장의 사진을 프린트로 다 전시할 수 없어 사진작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정현씨와 함께 LCD 화면을 활용한 영상 아트로 기획했죠. 사진들 옆에 정호승, 최승자, 정현종 시인의 시를 적어서 좀 더 감정몰입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참고로 사진전의 부제인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은 시인 문태준의 동명 시(집)에서 따온 것이다.

사진전까지 마치면 다음엔 무엇을 할까. “3개월간 머리를 비우면서 요리를 배워볼까 합니다. 매일 아내에게 얻어먹었으니 한 번쯤은 제가 대접해야죠.(웃음) 그 후에는 다시 새로운 주제의 사진을 치열하게 고민할 겁니다. 난 아직 80밖에 안 됐으니까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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