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배우 권해효(52)에게 제70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는 많은 ‘처음’으로 기억될 듯하다. 홍상수 감독과 함께한 영화 중 첫 주연을 맡은 ‘그후’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다. 그 역시 데뷔 이래 첫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뜻이다. 더구나, ‘그후’는 그가 아내인 배우 조윤희와 처음 함께한 영화다. 극 중 부부 역으로 호흡을 맞췄다. 22일 ‘그후’ 공식 상영 레드카펫 내내 아내와 손을 꼭 잡고 걸었던 권해효. 다음 날 칸 어느 호텔에서 만난 그는 “결혼생활 만 24년 만에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고 벅찬 마음을 털어놨다.
- 공식 상영 후 감격한 표정이더라.
“처음 극장에 들어갈 때 모든 관객이 기립해서 맞아주는 경험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불이 탁 꺼지고 칸영화제 70년 역사를 담은 공식 트레일러가 나오는데 내가 영화사의 한복판에 있다는 게 실감나더라. 짜릿했고, 고마웠다. 홍상수 감독의 현장은 단 3주여도 에너지가 쭉 빠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굉장히 밀도가 높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았다. 더 의미 있는 3주가 됐던 것 같아서.”
- 칸영화제 초청을 예상했나.
“홍 감독이 먼저 찍은 ‘클레어의 카메라’가 초청될 줄 알았다. 칸영화제가 70주년이기도 하고, 주연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가 칸에서 갖는 위상이 있잖나. 그런데 어느 날 ‘그후’까지 두 작품이 다 초청됐다고 연락이 왔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게 아내와 같이 칸에 간다는 거였다. 살면서 그런 경험은 정말 귀하잖나.”
- ‘그후’는 홍 감독과 함께한 네 번째 영화다. 어떻게 부부가 함께 출연하게 됐나.
“그전까진 홍 감독에게 ‘언제부터 언제까지 시간 있니?’ 이렇게 출연 제의가 왔다. 그런데 지난해 12월이었나, 그가 전화로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뭘 하고 있니’ ‘내 작품은 얼마나 봤니’ ‘어느 배역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 같은 것들. ‘거의 다 봤는데, 솔직히 형(홍상수 감독을 권해효는 이렇게 불렀다) 영화에 나오는 어느 종류의 인간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흥미롭긴 하지만 내 삶과 너무 다르다’고. 그러던 차에 홍 감독이 ‘이번엔 너랑 찍고 싶다’고 하더라.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업은 막막했을 것 같은데, 요 얼마간 계속해서 내 생각이 나고 나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해볼 수 있을지 생각이 됐다고 말이다. 크랭크인(1월 5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12월 말 그가 아내도 함께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 이전에 만난 적 있는 사이였나.
“한 번도. 어쩌면 내가 개인적인 얘기를 할 때 늘 아내 얘기를 많이 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아내가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1993) 이후 한 번도 영화를 안 찍었거든. 아내도 처음엔 고사했다. 그러다가 테스트촬영 날 홍 감독에게 다시 아내와 와 달란 부탁을 받고 전했더니 문득 아내가 ‘나도 홍상수란 사람이 궁금하다’면서 따라나섰다. 그날 현장에서 즉흥으로 일종의 부부싸움 상황극이 주어졌고, 홍 감독이 아내에게 정식으로 출연 제의하면서 모든 게 시작됐다. 어제 영화를 처음 봤는데, 아내와 첫 촬영 때 가졌던 떨림들이 극 중 오프닝신의 묘한 긴장감으로 잘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불륜에 빠진 한 남자와 세 여자의 이야기다. 대화 위주의 평범한 멜로라는 다소 아쉬운 평가도 있던데.
“내게는 근자에 드물게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 홍상수 감독의 마음이 느껴졌다. 극 중 봉완(권해효)과 아름(김민희)이 사는 것에 대해 대화하는 신에서 한 컷 길이가 11분이다. 어떤 기술, 장치를 최소화하고 홍 감독 자신만의 리듬과 호흡으로 빚어낸 장면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두 번째 영화(‘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까진 그와 작업하며 마음속에 뭔가 불편함이 있었다.”
- 어떤 불편함일까.
“선입견이라고 해야 할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있었고, 홍상수의 인물들을 ‘저 지질한 놈들!’ 하고 낄낄거리며 봐왔다. 그런데 정작 그의 영화가 내 마음을 움직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 마음이 바뀐 계기라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를 보면서 진짜 팬이 됐다. 극 중 춘수(정재영)가 극장에 시사회를 보러 온 희정(김민희)한테 가서 ‘만나서 반가웠다’ ‘고마웠다’고 얘기하는 마지막 장면. 살면서 누군가한테 그렇게 말할 기회가 별로 없잖나. 순간 ‘아, 홍상수 감독은 누군가를 진짜 만나고 있구나’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울컥했다. 그때부터 홍 감독의 모든 것을 지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그의 영화들을 정말 좋아했다. 그와의 작업도 ‘밤의 해변에서 혼자’(3월 23일 개봉)부턴 모든 게 편안해졌다.”
- 배우로서 홍 감독 영화의 매력을 말한다면.
“그의 영화의 진실은 이런 것 같다. 우린 정작 우리 인생은 1초 후를 모르면서, 영화에 리얼리티를 담는답시고 미리 상황을 정해놓고 연기해나간다. 그런데 홍 감독의 영화는 촬영 상황을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난 일에 가장 가깝게 만들어 놓는다. 배우뿐 아니라 감독 역시 영화 한 편을 만들어가면서 그 신을 쓰고 찍은 다음 모니터링하며 받은 느낌을 바탕으로 다음 신을 쓴다. 예측 가능한 조건 안에서 모든 걸 만들어내려는 TV나 상업영화 같은 쇼비즈니스 업계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수없이 바뀐다, 우리 인생처럼. 그게 즐거운 거다.”
- 남은 일정은 어떻게 보내나.
“28일까지 아내와 파리를 여행한다. 이렇게 같이 칸에 와 있는 게 지금도 그저 기쁘고 얼떨떨하다.”
칸(프랑스)=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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