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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놀다가는 세상, 희망가를 불러야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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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호 08면

[정재숙의 공간탐색] 소리꾼 장사익의 작업실

그림 안충기

그림 안충기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널빤지 모양 책상 언저리가 일터 #요즘은 美 재즈 가수 스콧 공부 #삶의 쓴맛, 신맛 절여진 목소리 #인생유전이 익어 터져 나온 듯 #“맺고 푸는 것이 우리 소리의 맛” #조수미 초대하던 클래식 기획사 #올해 공연의 주인공으로 낙점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펜화가인 안충기 섹션에디터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이 연재물의 네 번째 주인공은 가수 겸 작곡가 장사익(68)이다. 열대엿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뒤풀이 가수’를 자임하며 노래의 힘을 따른 끈기로 마흔다섯에 소리꾼으로 거듭났다.

피를 토하듯 혼신을 바쳐 노래하는 늙수그레한 사내의 신명이 무대를 달구면 청중은 소리바다에 둥실 떠 함께 흘러간다.


100년 된 옛집 대들보로 만든 널찍한 다용도 상에서 그는 노래하고 차 마시고 낮잠 자고 이야기를 나눈다. 창밖에 펼쳐진 앞산 큰 바위의 맥이 집안으로 흘러든다.

100년 된 옛집 대들보로 만든 널찍한 다용도 상에서 그는 노래하고 차 마시고 낮잠 자고 이야기를 나눈다. 창밖에 펼쳐진 앞산 큰 바위의 맥이 집안으로 흘러든다.

“난 작업실 없슈.”

빈말은 아니었다. 서울 세검정로 골짜기 높지거니 둥지를 튼 그의 집엔 음악인이 흔히 스튜디오라 부르는 방은 없다. 2층 마루방 한쪽에 놓인 큼직한 널빤지 모양 책상 언저리가 그가 노래하고 음악 듣고 차 마시고 얘기하는 일터다. 안동 고가(古家)의 100년 된 대들보를 가져다가 만든 상 앞에 앉아 그는 “이게 만능이여” 했다. 제삿날에는 제사상이 되고, 졸리면 침대 구실도 한다는데 “햇빛 들면 발바닥이 따땃하니 잠이 절로 와유” 하고 웃었다. 북한산·북악산·인왕산이 한눈에 보이는 널찍한 통유리 창을 내다보며 그는 “집도 복이다” 혼잣말했다.

툭 터진 공간 이곳저곳에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 널려 있다. 징과 북 같은 사물(四物)을 여럿 모은 그는 때로 그 징과 북을 치며 한나절을 보낸다. 신문 더미를 쌓아 놓고 묽은 먹으로 글씨도 쓴다. 이미 소문난 그의 붓글씨 솜씨를 스스로는 ‘먹 장난’이요 ‘낙서’라 했다. 그러면서도 “추사체를 한글로 쓰면 월매나 좋을까” 한숨 쉬었다.

20여 일 전 그는 남동생을 앞서 보냈다. 어쩌다 보니 의절하다시피 맘이 안 맞던 동생이었는데 세상 떠나기 며칠 전에 그를 위해 음악회를 열었다. 눈물을 흘리며 형의 노래를 듣던 동생은 “형, 나 최선을 다했는데 힘드네” 했다. 그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며 동생을 향해 두 손을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세상살이 한바탕 노는 거유. 지구별에 놀러 와 반짝반짝하다가 다시 별로 가는 겨. 고향 찾아 가는 거니 슬퍼할 거 뭐 있나유. 아 참, 이 노래 한번 들어 봐유.”

그는 아침부터 듣고 있었다는 미국 재즈 가수 지미 스콧의 음반을 틀었다. 3여 년 전 별세한 스콧은 가수 마돈나가 “노래로 나를 울게 한 유일한 가수”라 우러렀다는 재즈 보컬의 전설이다. ‘천상의 음색’이란 찬사를 들었던 스콧은 ‘가수들의 가수’로 불릴 만큼 희귀한 목소리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찢곤 했다는데 장사익은 지금 그의 노래를 공부하며 목청을 다듬고 있다. 지난해 성대수술을 한 뒤 소리가 예전 같을까 걱정했다는 그는 “에라 한번 질러봐” 하며 ‘찔레꽃’을 불렀는데 소리가 막 나와 줘서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김치도 잘 익은 놈은 숙성이 됐다고 하잖유. 노래도 성숙해야 맛있쥬. ‘노래 속’이란 게 있는겨. 멋모르고 불렀을 때하고 뭘 좀 알아 속이 꽉 찬 뒤 불렀을 때하고 달라.”

삶의 쓴맛, 신맛이 젓갈처럼 절여진 그의 목소리는 신산했던 자신의 인생유전이 익어 터져 나온 것이다. 음을 벼려가는 그의 연장은 세상 슬픔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사내의 마음인 셈이다. 시인 김형영의 시 ‘따뜻한 봄날’에 멜로디를 붙인 ‘꽃구경’은 그 절정이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내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깊은 산속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맬까 걱정인 노모는 아들을 위해 솔잎을 따서 걸음걸음 뿌린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하는 이들을 위해 그는 노모의 마음을 담아 ‘소리꽃’을 뿌린다. 그의 칼칼한 목울음이 한 대목, 두 대목을 넘으며 응어리를 만들다가 퍽 쏟아 내는 파열음은 우리 가슴으로 우르르 날아와 퍼진다. 충남 홍성군 광천 촌놈이 열일곱에 무작정 서울에 와 안 해본 일 없이 떠돌다가 뒤늦게 붙든 소리의 길은, “헐 때까지 신나게 하다 갈” 숙명의 길이다.

“요새 다들 구십 수는 누리게 됐다잖어유. 그렇게 치면 내가 마흔 다섯에 데뷔 했응께 딱 좋은 때 시작한겨. 나는 내 하고자플 때 내 하구 싶은 대로 노래했어유. 그냥 밥 먹고 똥 싸고, 그런 것처럼 무대가 아니라 사람들 사는 동네 골목에서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르는 거쥬.”

그는 맺고 푸는 것, 꽉 묶었다가 시원하고 개운하게 풀어 주는 것이 우리 소리의 맛이라 했다. ‘장사익 소리판’ 무대가 1부는 창작곡 위주로, 2부는 가요를 섞어 쇼처럼 하는 까닭이다. 해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던 ‘꽃인 듯 눈물인 듯’ 소리판이 올해는 더 커졌다. 클래식 전문 기획사 ‘크레디아’가 소프라노 조수미 등을 초대하던 ‘크레디아 파크 콘서트’의 올 주인공으로 장사익씨를 낙점했기 때문이다.

“쓰리고 고된 일 끝에 살짝 좋은 세상이 온 것 같잖유. 그 마음 열어젖혀 한바탕 놀아야쥬. 탁자를 탁탁탁 치며, 술도 한 잔 찌끄리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희망가’를 목청껏 불러야쥬.”

 몇 시간 불러도 끄떡없는 건 ‘장 체조’ 덕

“기냥 장 이걸 했슈. 이 나이 되도록 힘 안 부치고 몇 시간 노래하는 기력이 이 덕이유.”

오래 했다 해서 ‘장 체조’, 장씨 성 가진 이가 한다 해서 ‘장 체조’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일어나지 않고 한 시간여를 요 위에서 뭉갠다. “깨면 다시 자고 싶잖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사지를 개구리처럼 꼼지락대는데 효험 좀 봤슈.”

약식이지만 순서대로 보여준 체조는 과연 주변에 이름이 날 만했다. 먼저 엎드려 베개에 가슴을 깔고 눈 주변을 누르며 비벼준다. 동시에 다리를 쳐 준다. 시간이 넉넉할 때는 300번쯤 한다고 했다. 이어서 발바닥 비비고 치기, 발목 돌리고 치기를 한 30번씩 한다. 요가에서 ‘고양이 자세’라 부르는 등 구부리고 허리 들어올리기를 한 뒤 일어나며 팔굽혀펴기로 이어 준다. 이쯤 되면 눈이 번쩍 떠진다.

“내 오늘 쇼를 허네.”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정성스레 지압하고 발을 털면서 목 운동, 팔 휘두르고 엇가르기, 무릎과 발목 돌리기, 죽비로 배와 어깨 때리기를 보여 줬다. 세검정 집에서 인사동 정도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것도 건강 비결이다. 그는 지하철 긴 계단을 보면 “오늘 돈 벌었네” 손뼉을 친다며 “세상은 헌 만큼 나와유” 했다.



장사익  1949년 충남 홍성생. 한국인이 손꼽는 절창의 가수이자 작곡가. 흥과 한을 넘나들고 웃음과 울음이 범벅되는 그의 노래는 판소리·민요·가요의 혼종으로 ‘장사익풍’이라 불린다. 대표곡 ‘찔레꽃’ ‘꽃구경’ ‘허허바다’ 등은 듣는 이와 부르는 이가 하나 되는 경지를 일궜다. 궂은 일, 기쁜 일 가리지 않고 좋은 사람들이 부르면 달려가 소리 한 자락 뽑는 ‘노래 보시’의 왕이다. KBS 국악대상 금상,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대상 국악상 등을 받았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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