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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스코틀랜드 아가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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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호 27면

린 손덱을 내보내고 새로 마련한 턴테이블. 영국 가라드 301에 덴마크 오르토폰사의 RMG-212 톤암과 SPU G타입 카트리지를 조합했다.

린 손덱을 내보내고 새로 마련한 턴테이블. 영국 가라드 301에 덴마크 오르토폰사의 RMG-212 톤암과 SPU G타입 카트리지를 조합했다.

결국 그녀를 떠나보냈다. 내 방에 들인 지 25년 만이다. 그 긴 세월을 하루같이 만지고 쓰다듬고, 가끔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an die Musik : 턴테이블 이야기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용산 전자랜드였다. 한 오디오숍 진열장에 단아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스코틀랜드산 턴테이블 ‘린 손덱 LP-12’. 그를 칭송하는 말들을 오래도록 들어왔다. 초정밀 금속 가공, 가장 비싸진 않지만 가장 좋은 소리, 간결하고 아름다운 디자인…. 까다롭지만 잘 세팅하면 정확하고 화사한 노래를 불러주는, 그래서 도도한 아가씨 같은 린 손덱은 나의 로망이었다.

가장 비싸지 않다해도, 그녀의 몸값은 두 달 치 월급이었다. 오랜 내핍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그녀를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전의 풋사랑은 테크닉스 SL-10이었다. 일제답게 작고 실용적인 턴테이블이었는데, 고음에서 소리가 찌그러졌다. 스웨덴 바리톤 가수 호칸 하게고드가 부르는 ‘거룩한 밤(O, Helga Natt)’의 높게 내지르는 부분에서 테크닉스는 쇠 소리를 냈다. 스코틀랜드 아가씨는 이 부분을 어떻게 부를까.

린 손덱을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둥근 알루미늄 플래터가 돌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곧 움직임이 사라졌다. 잠에 빠진 듯, 고요히 돌아가는 정숙함이 린 손덱 명성의 핵심이었다. 음반을 올리고 바늘을 내렸다. 하게고드의 목소리는 가파른 고개들을 매끄럽게 타고 넘었다. 경탄할 만한 ‘연주’였다. 그 순간 이후 밀월의 25년이 흘렀다.

CD보다 LP가 더 음악적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가 LP로 음악을 듣는 이유는 턴테이블 때문이다. 턴테이블은 앰프나 스피커와 달리 몸을 움직인다. 검고 둥근 레코드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그 위를 긴 톤암이 원호를 그리며 천천히 미끄러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위해 열심히 음악을 연주한다는 느낌이 든다.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동안에는 소파에 눕지 않고 중간에 함부로 끄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음악에 대한 집중이 높아진다.

이사는 예민한 그녀에게 비상 상황이었다. 조금만 흔들려도 균형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두 팔로 안고 승용차 뒷좌석의 쿠션 좋은 자리에 앉힌 다음 과속방지턱을 조심해서 넘었다. 새 집에 도착해서도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아 줬다. 그런 그녀를 왜 떠나보냈는가.

25년 세월에 그녀는 병이 깊었다. 나한테만 들렸지만 그녀의 심장은 간혹 힘겨운 소리를 냈다. 병원에 데려가 치료했지만 완쾌되지 않았다. 음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은 전광석화처럼 해치워야 한다. 어느 날 저녁 턴테이블 장인이 방문해 다른 턴테이블을 설치해주고 그녀를 데려갔다.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장인은 쿠션 좋은 자리에 그녀를 앉히고 천천히 차를 몰고 떠났다.

새 턴테이블은 잉글랜드산 ‘가라드 301’이다. 1950년대에 만들어진 골동품이다. 그럼에도 보존상태가 새것과 다름없어서 30년은 문제없을 것 같다. 가라드 301은 영국 BBC의 방송용으로 개발돼 튼튼하다. 내부엔 정밀 가공한 금속 부품이 아름답게 배열돼 있고 상판엔 열경화성 수지로 만든 검은 색 조정 손잡이를 달아 산업용 장비 아우라를 풍긴다. 소리 성향은 묵직하고 여운이 깊다. 한 오디오 애호가는 “소리를 머금었다가 뱉는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했다. 참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던 그루미오의 바이올린은 푸석했고, 피아노는 판자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관현악은 더 형편없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운명’은 헝클어진 실타래였다. 스코틀랜드 아가씨와 한솥밥을 먹던 프랑스 아가씨(Jadis 앰프)와 미국 아저씨(JBL 스피커)가 낯선 잉글랜드 사내를 거부한 것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 어쩌라고, 그녀는 이미 떠났는데….

전화를 받은 턴테이블 장인은 나를 진정시켰다. “서로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합니다. 턴테이블은 조립한 지 이제 사흘이잖아요. 카트리지도 아직 뻣뻣하고….” 에이징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생물도 아닌 것이, 오디오는 낯을 가린다. 서로 친해지도록 이틀간 여러 장르의 음악을 틀었다. 생상의 ‘오르간 교향곡’도 오랜만에 크게 울렸다. 카트리지 끝의 다이아몬드 바늘은 넓고 거친 오르간 소릿골을 통과하며 지진계처럼 흔들렸을 것이다. 격렬한 몸 풀기 끝에 가라드는 서서히 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풍부한 저역을 바탕으로 힘차고 진득한 소리가 내 음악실을 가득 채웠다.

린 손덱은 최고의 턴테이블 전문가에게 맡겨졌다. 곧 건강을 회복해 다시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내겠나 싶었는데 벌써 조금씩 잊혀 진다. 그렇게 오래, 그토록 애틋하게 사랑하고 아낀 오디오는 여태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게 분명하다. 잘 가요! 스코틀랜드 아가씨.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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