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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끌어안지 않을 겁니다 철저하게 처절하게 다가가야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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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호 08면

발레리노 김용걸(44), 현대무용가 김설진(36)·김보람(34). 무용팬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세 안무가가 한 무대서 맞붙는다. ‘안무가들의 뮤즈’로 통하는 라벨의 ‘볼레로’를 놓고서다. 저 유명한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1961) 이후 세계적인 안무가들이 끊임없이 도전해 온 성역과도 같은 음악과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안무가 세 사람이 4각의 로맨스를 펼치는 셈이다.

‘쓰리 볼레로’의 세 안무가 김용걸·김설진·김보람

세 남자가 각자의 안무 철학으로 승부하는 ‘쓰리 볼레로’(6월 2~4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는 국립현대무용단 안성수 신임 예술감독이 야심차게 기획한 첫 신작이다. 지난해 취임과 동시에 “현대무용의 재미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안 예술감독의 방향성을 한바탕 축제처럼 풀어내는 무대로 이미 전석 매진일 정도로 화제다.

세 안무가는 뮤즈 ‘볼레로’의 미소를 갈구하며 모두 직접 무대에 오르는데, 구애작전은 제각각이다. 김용걸은 85명의 오케스트라와 37명의 무용수를 투입해 인해전술을 펼치고, 김설진은 라벨의 작곡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도의 차별화로 도전한다. 그간 끈질기게 구애해 온 만큼 이번에야말로 ‘철저하게 처절하게’ 끝장을 보겠다는 김보람의 각오도 새롭다. 과연 뮤즈의 응답은 어떨까. 한국 무용계에서 가장 바쁜 세 남자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어렵사리 한 자리에 모았다.


김용걸의 ‘볼레로’클래식 발레를 베이스로 볼레로 원곡의 네 가지 리듬에 각각의 안무를 입혀 20여개의 버라이어티한 프레이즈로 완성했다. 한예종 소속 무용수 37명의 군무를 수원시향 85명이 라이브 연주로 받쳐주는 대규모 스케일의 무대다. 김용걸이 직접 센터에 선다.

김용걸의 ‘볼레로’클래식 발레를 베이스로 볼레로 원곡의 네 가지 리듬에 각각의 안무를 입혀 20여개의 버라이어티한 프레이즈로 완성했다. 한예종 소속 무용수 37명의 군무를 수원시향 85명이 라이브 연주로 받쳐주는 대규모 스케일의 무대다. 김용걸이 직접 센터에 선다.

“볼레로라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인이 있어요. 감히 접근하기도 힘들지만 언젠가는 내 것으로 만들고자 집요하게 조금씩 다가가는 중이죠. 그녀는 눈치도 못 챘는데 내 마음은 이미 가진 듯한 느낌?(웃음) 그게 ‘볼레로’의 매력인 것 같아요.” (김용걸)

‘쓰리 볼레로’의 시작은 김용걸이었다.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학생들의 졸업작품을 위해 안무한 ‘볼레로’가 안성수 감독에게 꽂힌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에 와서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작품을 하고 싶은데, 김용걸 선생의 ‘볼레로’가 참 즐겁더군요. ‘볼레로’를 많이 해봤고 개성도 강한 김보람·김설진씨와 함께 가장 화려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기획했습니다.”(안성수)

그런데 김용걸의 ‘볼레로’는 김보람에게서 시작됐다. 2011년 김보람 안무의 볼레로 솔로를 추면서 안무 욕구가 싹튼 것이다. “파리오페라에 있을 때 베자르의 볼레로도 해봤지만, 보람 선생에게 많이 배웠어요. 그때 엄청 힘들었거든요. 적당한 음악인 줄 알았는데 그걸 완전히 해부하니 뭐가 많이 나오더군요. 거기에 집요하게 동작을 입히는 치밀함에 제 춤도 많이 영향 받았습니다.”(용)

발레만화 ‘스바루’를 보고 ‘볼레로’를 동경하게 됐다는 김보람은 이미 7편의 ‘볼레로’를 만든 마니어다. “볼레로로 끝장을 보고 싶다”는 그는 그 모든 작품이 “전혀 다르고도 완전 똑같다”고 했다. “음악 분석으로 진행하는 건 같지만 표현하는 무브먼트는 다르니까요. 이 작업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서 1년에 4편 만든 적도 있어요. 2년 전에 마지막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 됐음 하네요.(웃음) 계속 뭔가 부족한 것 같았는데, 이번에 정말 철저하게 처절하게 끝내 보려구요.”(김보람)

김설진의 ‘볼레로 만들기’“볼레로에는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벨의 고백에 주목한 무대. 음악그룹 ‘리브투더’가 일상에서 수집한 사운드를 볼레로 리듬에 맞춰 라이브로 연주하고, 김설진을 포함한 ‘무버’ 소속 6명의 무용수가 출연해 볼레로를 해체하고 무너뜨린다.

김설진의 ‘볼레로 만들기’“볼레로에는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벨의 고백에 주목한 무대. 음악그룹 ‘리브투더’가 일상에서 수집한 사운드를 볼레로 리듬에 맞춰 라이브로 연주하고, 김설진을 포함한 ‘무버’ 소속 6명의 무용수가 출연해 볼레로를 해체하고 무너뜨린다.

김설진에게도 이번이 5번째 ‘볼레로’ 도전이지만, 전혀 새로운 시도다. 음악 구조 자체에 주목해 악기를 싹 제거하고 일상의 소음만으로 구조를 다시 쌓아올리는 과감한 도전이다. “많은 안무가들이 라벨의 볼레로가 아니라 베자르의 볼레르를 재해석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라벨의 볼레로를 완전히 무너뜨린 상태에서 제 자신의 볼레로를 쌓아 보려구요.”(김설진)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는 1928년 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작곡된 곡. 캐스터네츠 리듬으로 반주하는 스페인 무곡 형식에 영감받아 명칭까지 그대로 따왔다. 그 해 초연된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의 오리지널 안무는 술집 테이블 위에서 홀로 춤추는 집시에게 점차 동화되는 구경꾼들의 폭발적 군무로 스펙터클을 완성하는 구조다. 이 원형이 기록으로 남아 많은 안무가들에게 영향을 줬는데, 지금은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에서 전설의 발레리노 조르주 돈의 춤으로 선보인 모리스 베자르의 안무가 원조로 통한다.

‘볼레로 매니어’ 김보람도 베자르의 영향을 고백했다. “처음 영상을 봤을 때 무용이 이럴수도 있구나, 충격이 컸거든요. 요즘도 조르주 돈의 영상을 찾아보곤 해요. 오리지널이란 것 자체에서 감동을 받는달까요.”(보)

하지만 김용걸과 김설진은 베자르의 영향을 부정했다. “저는 베자르의 볼레로를 추기 싫었거든요. 그 시대에 그런 작품을 만든 센세이션에 대한 경의는 있지만, 군무 입장에선 너무 단순해요. 다른 유명 안무가들도 그들의 큰 권력을 이용해 여자를 껴안은 거 같은 느낌이라 별로 맘에 안듭니다.(웃음) 저는 그녀의 가치를 귀하게 제대로 대접해서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용)

“베자르의 ‘볼레로’를 알기 전에 박경림의 ‘착각의 늪’ 안무를 먼저 알았는데, 둘이 똑같더군요.(웃음) 전 오히려 안성수 볼레로에 영향 받았어요. 안 감독님도 5년 동안 볼레로를 계속 변주하셨고 저도 출연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안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기거든요. 베자르와 다른 해석을 해야 재밌어지는 것 같아요.”(설)

김용걸의 ‘볼레로’

김용걸의 ‘볼레로’

김설진의 ‘볼레로 만들기’

김설진의 ‘볼레로 만들기’

김보람의 ‘철저하게 처절하게’

김보람의 ‘철저하게 처절하게’

“볼레로는 범접하기 힘든 매력적인 여인”

김보람으로 시작해 김용걸로 끝나는 무대는 편곡이 전혀 다른 ‘볼레로’가 3차례 반복된다. 김용걸이 원곡의 스케일을 살리기 위해 수원시향 85명을 무대 위로 올렸다면, 김보람은 10명의 연주자가 각자 두세개씩 악기를 바쁘게 소화한다. 반면 김설진의 무대에는 악기가 없다. “볼레로를 계속 듣다 보니 환청이 들리는데, 어느 날 주변 소음과 겹쳐져 그게 볼레로처럼 들리는 거예요. 이걸 관객들도 경험해보면 어떨까 싶어 소음 채집을 시작했죠. 라벨도 자신의 유일한 걸작 볼레로에 음악이 없다고 했쟎아요. 그 말대로 정말 구조만 갖고 굉장한 음악이 탄생한 거라면, 악기 없이 다른 소리만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라이브 소음 연주와 기계음들을 섞는 실험인데, 결국 그게 악기가 되버리더군요.”(설)

‘볼레로’는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는 작은 북 솔로로 시작해 같은 주제의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가 계속 더해지며 점차 고조되어 가다 끝내 폭발시키는 음악적 구조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원시적 제의나 에로티시즘, 내재된 폭력성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 사람은 음악 구조 자체에 천착한다. “정말 대단한 음악이에요. 단순한 리듬 안에 숨어있는 그 집요한 반복이 무서울 정도죠. 거기 맞춰가다 보니 생긴 해석은 있어요. 저는 이미 길들여져서 자연스럽지만 무용수들은 답답해 하더라구요. 풀어놓으면 너무 자연스러운데 박자를 세면 못 움직이기도 하고, 반대로 자유를 더 불편해 하는 친구도 있고. 볼레로 음악 자체가 사회구조와 비슷하게 느껴졌달까. 구성원으로서 구조에 맞춰야 되는지 벗어나야 되는지, 뭐가 진짜 자유로운 건지 지금도 질문하는 중이죠.”(설)

“전 좀 희생의 느낌이랄까요. 무용수들도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얘길하죠. 너무 힘들고 괴로운데 왜 이렇게 어렵게 가야되나 싶은데, 그게 다 볼레로를 위한 희생 아닐까 싶어요. 엄청난 틀을 가진 음악을 벗어날 수도 안 벗어날 수도 없거든요. 관객도 무용수를 통해 그 소리 하나하나를 계속 전달받게 될텐데, 그걸 다 캐치하려면 좀 피곤하실지 몰라요.”(보)

신작을 만드는 어려움 탓에 ‘혼돈과 희생’을 논하는 두사람에 비해 이미 완성된 작품을 손보고 있는 김용걸은 자신이 넘쳤다. 음악이 주는 감흥의 시각화만으로 특별한 충족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크레센도가 주는 고조감, 긴장감이 있쟎아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마지막 폭발을 충족시켜주는 모션들까지, 군대 열병식처럼 보는 재미가 있을 거에요. 음악이 나오면 같이 흥얼거리는 것처럼 춤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순간 ‘빵’ 터지면서 즐거우실 겁니다.”(용)

김보람의 ‘철저하게 처절하게’볼레로 원곡을 선율과 리듬, 화음으로 해체된 상태에서 흩어진 소리를 춤으로 재조립해 형상화해간다. 김보람을 포함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9명과 수원시향 10명의 소규모 앙상블이 볼레로의 음악과 춤이 가진 표현의 기원을 ‘연구’하는 무대다.

김보람의 ‘철저하게 처절하게’볼레로 원곡을 선율과 리듬, 화음으로 해체된 상태에서 흩어진 소리를 춤으로 재조립해 형상화해간다. 김보람을 포함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9명과 수원시향 10명의 소규모 앙상블이 볼레로의 음악과 춤이 가진 표현의 기원을 ‘연구’하는 무대다.

“즐겁게 걷기만 해도 춤인 겁니다”

‘쓰리 볼레로’는 지난 3월 국립현대무용단의 ‘혼합’ 공연 당시 자유소극장 로비에서 팝업스테이지를 열었고, 어린이날엔 예술의전당 음악분수대 앞에서 플래시몹까지 진행했다. 현대무용이 ‘호객’을 위해 대중 속으로 뛰어 들어간 셈이다.

“제안하시길래 티는 안 냈지만 첨엔 당황했어요. 로비에서 뭘 한다고? 헐. 그림이 안 그려졌죠. 막상 좋은 환경, 좋은 장비로 진행했고 보는 분들도 굉장히 집중해 봐주셔서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용)

“저는 반성도 좀 했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매진을 시켰어야 되는데.(웃음) 저희는 거리공연도 꽤 하지만, 현대무용이 거리에서 사람들 이목을 못 끄는 경향이 있거든요. 특유의 어려움 때문인데, 이해는 못시켜도 어떻게 하면 더 집중시킬지 고민하게 됐습니다.”(보)

2014년 ‘댄싱9’으로 현대무용 돌풍을 일으켰던 김설진은 “당시 팬덤으로 왔던 관객들이 이제 진정한 무용애호가가 됐다”면서도 “더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저도 그렇게 작은 무대를 만들어놓고 프리젠테이션하듯 공연홍보를 해본 건 처음이에요. 하지만 새로운 시도는 뭐든 긍정적입니다. 수단방법 가릴 것 없이 뭐라도 해봐야죠.”(설)

국립현대무용단은 앞으로도 모든 공연에 팝업스테이지를 포함한 공격적인 홍보 전략을 지속적으로 펼쳐갈 계획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 현대무용, 아니 춤 자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세 안무가에게 ‘춤이 인간에게 가장 좋다. 모든 사람은 춤춰야한다’는 필립 드쿠플레의 철학에 대해 견해를 물으니 모두 격하게 동의했다.

“한국에선 춤이 뭔가 보여줘야 되거나 잘해야 된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며칠 전 거리축제에 참가했는데, 주변에서 클럽처럼 디제잉을 하고 있는데도 다들 그냥 지나가요. 너무 신기해서 우리가 그 옆에서 맥주 마시며 춤추고 놀았죠. 그럼 같이 놀 줄 알았는데 공연하는 줄 알고 구경을 하더군요. 그만큼 한국인들이 춤을 멀게 느끼는 것 같아요. 사실 별거 아닌데. 저는 모든 사람이 춤추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춤이라고 인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즐겁게 걷기만 해도 춤인 겁니다. 춤이란 어떤 거라고 구분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보)

김설진도 “춤은 출 때가 제일 재밌다”면서 “노래방처럼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춤출 공간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은 건 노래방 문화 때문인데, 춤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예전에 한 관객이 묻더군요. 왜 삶에서 춤이 필요한가. 그땐 대답 못했는데 오래 고민하다 최근에 답을 얻었어요. 전자제품만 사도 사용설명서를 읽고 잘 쓰려고 하는데, 몸을 갖고 태어났으면서 몸에 대한 생각을 얼마나 하나요. 춤을 추면 짧은 인생 동안 자기 몸을 한껏 누리고 갈 수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건데 모든 사람이 즐기지 못하고 있어요. 평생 춤을 안 추고 산다는 건 사랑 한번 못 해본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설)

그러자 김보람이 “요즘 나도 왜 이렇게 열심히 춤추나 고민을 한다”고 거들더니, “내 만족만을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서 춤을 춘다. 결국 춤이 발전해야 후세대가 좋아질 것”이라는 거창한 결론을 맺는다. 다소 엉뚱하게 들려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니 옆에서 김용걸이 대신 답한다. “근거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꼭 아침에 연습을 합니다. 혹시 거르고 하루를 시작하면 너무 큰 차이가 나요. 춤을 추고 행복한 상태에서 누굴 만나야 그 행복이 전파되는 느낌? 그러니 춤을 춰야 세상이 좋아지는 거죠. 아마 다들 동의하실 겁니다.(웃음)”(용)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현대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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