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출범 직후부터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흡사 문민정부 초기를 보는 듯 하다.” 야당의 한 중진의원이 한 얘기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문민정부의 ‘데칼코마니’ 같다는 평가가 자주 나온다. 적폐 청산ㆍ개혁 드라이브ㆍ파격 인사ㆍ고공 지지율 등 김영삼 전 대통령(YS) 집권 직후 상황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문재인 정부 초기 정국을 두고서다.
과거 청산 및 개혁 드라이브 #개혁 성향 인사의 파격 등용 #임기 초 지지율 고공 행진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지난 17일 펴 낸 리포트 ‘신정부의 국정 환경과 국정운영 방향’도 역대 정부를 정리하며 문민정부에 대해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로 과거청산 및 개혁진영 영입ㆍ발탁’이라고 비교적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①하나회 해체와 비슷한 검찰 개혁=문민정부는 출범 직후인 93년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를 추진해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군부 엘리트 사모임인 하나회의 해체는 그간 주요 권력기관이었던 군과 정치권의 연결고리를 단절하는 계기가 됐다.
그 작업은 YS의 취임과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 직후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국장 등이 연루된 ‘돈봉투 만찬’ 조사를 착수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고 있다. 엄태석 서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하나회 숙청은 군과 구 여권(민정당) 세력의 동반 약화를 가져온 1석2조였다”며 “현재 청와대가 집권하자마자 검찰을 칼을 겨눈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여권 관계자도 “‘돈봉투 만찬’은 단순한 건이 아니다. 검찰 개혁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으로 보면 된다”며 “YS는 군(軍)이라면, 문재인은 검(檢)을 잡아 향후 고강도 개혁 드라이브의 동력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②파격 인사: 김 전 대통령은 황산성 변호사(환경부 장관), 한완상 교수(통일부총리) 등 정치권 밖 인사를 등용해 화제가 됐다. 또 그간 군 출신이나 법조인이 도맡았던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에 국제 정치를 전공한 김덕 당시 한국외대 교수를 전격 임명한 것도 파격이었다.
문 대통령도 조국 서울대 교수(민정수석), 강경화 유엔 정책특별보좌관 (외교장관 내정자), 장하성 고려대 교수(정책실장) 등을 발탁했다. 또 장 실장과 함께 ‘재벌 개혁의 쌍두마차’로 불린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공정거래위원장에 임명했다.
정치권에선 이런 인사를 두고 '유명인이나 인기인 중심의 인선'이란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취임초 새 바람을 일으키며 국정의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③고공 지지율과 신드롬: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 해 83%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YS는 못말려』같은 최초의 대통령 풍자 유머집이 등장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가 하면 길거리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콧구멍이 강조된 캐리커쳐 티셔츠가 판매되는 등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문 대통령도 지난 16~18일 한국갤럽이 실시한 ’향후 5년 직무 수행 전망‘ 조사에서 ‘잘할 것’이라는 응답률이 87%로 나타나는 등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른바 ‘문재인 굿즈(관련 상품)’도 호황이다. 서울 부암동의 한 커피점은 문 대통령이 취임 전 종종 찾아와 즐겨 마시던 원두 비율로 만들었다는 ‘문 블렌드’를 판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문 대통령이 쓰는 안경테(린드버그), 등산복(블랙야크) 등도 인기다. 블랙야크 측은 “문 대통령이 입은 해당 등산복은 단종된 모델이지만 워낙 찾는 문의가 많아 ‘M가디언재킷’이라는 이름을 붙여 재출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던 ‘역사바로세우기’(문민정부)와 국정교과서 폐기 방침(문재인 정부), 총독부 건물 폭파(문민정부)와 위안부 재협상 움직임(문재인 정부) 등 비교적 강경한 대일(對日) 인식, 5ㆍ18 민주화운동 지정(문민정부)과 5ㆍ18 정신 헌법 반영 움직임(문재인 정부) 등에서 공통점을 찾는 이들이 있다.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것도 두 대통령 시기 뿐이다.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은 모두 경남 거제 출신으로 고향도 같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도 지난 4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지난 1987년도에 아버님이 픽업하려 했던 사람이 노무현, 문재인 두 사람이었는데 문재인 변호사를 먼저 픽업할 뻔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문민정부는 왜 꼬였나=문민정부의 거침없는 기세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첫 번째 악재는 각종 재난과 사고였다. 94년에는 성수대교, 이듬해인 95년에는 삼풍백화점이 연이어 붕괴하면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로 인해 민주당 등 야당은 개원 중이던 국회를 중단시키고,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등 공세에 나섰다. 이원종 서울시장이 경질되고 김 전 대통령은 대국민사과를 하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국정 운영 초반의 기세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 전 총리 등 민정ㆍ공화계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의 이탈도 집권 기반을 약화시켰다. 김 전 총리는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2인자로 불렸지만 김 전 대통령과 갈등을 겪자 민정당과 공화당 출신의 보수 인사들과 함께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95년 지방선거에서 대구ㆍ경북 및 충청권에서 ‘녹색 바람’을 일으키며 선전해 제3당으로 자리잡았다.
대북 기조 혼선도 문민정부의 개혁 동력을 약화시키는데 한몫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라고 발언했다. 특히 대북 유화론자인 한완상 통일부총리의 발탁은 획기적인 남북관계의 전환을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비전향 장기수인 이인모 노인 송환을 두고 보수층의 비판이 일었다. 이어 94년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일부 시민단체의 조문단을 파견하려 했으나 정부가 불허하자 진보층이 반발하는 등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민주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문민정부의 ‘논란’ 항목을 통해 “개혁 강공 드라이브가 독선으로 이어지고, 대북유화 제스처로 인한 남남갈등, 개혁피로증 (등으로 논란이 됐다)”며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주문했다.
유성운ㆍ하준호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