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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이 비트코인 거래 … 덩치는 커져가는 데 법적으로는 ‘미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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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 2014-경기성남-0036호’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 2014-서울강남-00168호’

가상화폐 하루 거래금액 3500억 #현행법은 ‘통신판매업자’로 규정 #보안·안전장치 마련 의무조항 없어 #규제 강화 땐 혁신 발목 잡을 우려 #금융위, 내달 제도 개선 방안 마련 #예수금 안전 관리 등 의무화 추진

 업종 신고번호만 봐서는 인터넷 쇼핑몰일 것 같다. 하나는 맞는데 다른 하나는 아니다. 위는 오픈마켓 업체인 ‘11번가’의 신고번호다. 아래는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의 것이다.

 국내에서 가상화폐는 아직 법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화폐도 아니고, 금과 같은 가치저장 상품도 아니다.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가상화폐 거래소는 옷이나 신발 판매를 중개하는 곳과 같은 업종에 속한다. 주식 시장을 총괄하는 ‘한국거래소’(KRX)는 물론이고, 수수료를 받고 주식 매매를 중개하는 증권사에 준하는 지위도 아니다.

 23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시가총액이 80조원을 웃도는 시장이지만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취급을 못 받고 있다.

 국내 가상화폐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빗썸에서 거래된 비트코인 거래량은 2014년 1715억원에서 2015년 4300억원으로 증가했다. 비트코인 외 이더리움·대시·라이트코인 등 다른 가상화폐까지 상장되면서 최근엔 하루 거래금액이 3500억원 수준으로 급증했다. 가상화폐 리서치 업체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한국 원화의 비트코인 거래 점유율은 세계 4위, 리플(은행 송금에 특화된 가상화폐, 시가총액 3위) 거래 점유율은 사실상 세계 1위(비트코인 제외)다.

 화폐인지 상품인지 구분이 안 되는 ‘자산’이지만 투자자가 ‘대박’을 꿈꾸며 가상화폐 시장으로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가상화폐를 중개하는 거래소에 관한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투자자(혹은 이용자)는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지난달 발생한 가상화폐 거래소 야피존 해킹 사건의 처리 과정이 그렇다. 규제 사각지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야피존은 지난달 22일 해커의 공격으로 거래소가 보관하는 일종의 예수금 55억원을 도난당했다. 전체 예수금의 37%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야피존은 이용자에게 이를 보상하는 대신 회원들의 자산을 37%씩 차감했다. 차감분에 대해선 차후 영업수익으로 차차 보상해주겠다고 안내했다. 사실상 손실을 고객에 떠안긴 셈이다.

 다른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는 해킹 위험에 대비해 다양한 보안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국내 3대 거래소인 빗썸ㆍ코인원ㆍ코빗 등은 출금시 일회용 비밀생성기(OTP) 인증 과정을 거쳐야 하고, 가상화폐의 일정 부분을 보안지갑에 따로 담아 인터넷 망과 분리된 은행 대여 금고에 보관하는 콜드 스토리지 등을 도입했다. 김진형 코인원 매니저는 “(코인원은) 이용약관에 따라 회사의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해 회원이 손해를 입게 될 경우 발생한 손해분만큼의 원화 및 가상화폐를 복구하도록 규정돼 있다”고 말했다. 빗썸 관계자는 “작년 7월부터 예치된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외부회계법인에 에스크로 서비스를 도입해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런 높은 수준의 보안이 가상화폐 거래소를 운영하기 위한 의무사항은 아니다. 한 한국인터넷진흥원 관계자는 “가상화폐 거래소는 사업자 신고만하면 영업이 가능한 통신판매업자로 분류된다”며 “현행법 체계 안에서는 통신판매업자는 금융회사 수준의 보안 요건을 갖출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현행 제도라면 영세한 거래소에서는 제2의 야피존 사건이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최근 한 리플 전문 거래소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좌에 넣어둔 약 5000만원 상당의 리플이 다른 계좌로 무단 송금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피해자가 불법 금융 추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에 피해를 호소하자 비슷한 피해를 당했다는 이들이 속출했다. 거래소 측은 “서버 해킹 사실이 없다”며 이용자 과실을 문제 삼아 보상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피해자들은 현재 카페 등을 중심으로 집단 민사소송에 참여할 이들을 모집 중이다.

 정확한 가치 산정이 어려운 가상화폐 특성을 활용한 금융사기도 빈번하다. 불법금융 신고 카페 운영자인 대마불사(네이버 아이디)는 “2014년경엔 이름조차 생소한 가상화폐인 리플에 투자하면 큰 돈 벌 수 있다며 해외에서 리플을 10원에 사와 투자자에게 100원에 팔았던 업체도 있었다”며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피해자들이 업체를 사기죄로 고소하려 했지만 리플의 가격이 얼마가 적정한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 없어 사기죄로 고소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리플은 최근에야 국내 거래소에 상장됐다).

 그는 “역설적인 건 이렇게 속아서 산 리플이 지금은 400원 이상에서 거래되고 있다”며 “가격이 오르자 이용자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모두 알고 있는 업체들이 몰래 리플을 빼 가는 일도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신고만 하면 가상화폐 거래소 영업이 자유롭다 보니 거래소를 가장한 불법 금융 업체가 난립할까 우려된다”며 “이대로라면 추가 피해 발생은 불 보듯 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규제를 하기도 어렵다. 현재 한국의 포지티브 방식(법에 규정된 것만 허용)의 법체제 하에서 가상화폐를 기존 금융 규제의 틀에 넣었다가는 혁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서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이 활성화할 무렵 영국은 ‘적기조례(赤旗條例)’란 규제를 도입한다. 자동차는 붉은 깃발을 든 사람보다 앞서가면 안 된다는 조례다. 마부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처사였다. 이 규제 때문에 자동차가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결국 증기기관 발명국인 영국이 자동차산업의 주도권을 독일에 뺏기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인호 고려대 컴퓨터정보통신대학원 교수(한국블록체인학회장)는 “과도한 규제를 도입하는 것은 핀테크 혁명의 시대 적기조례와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1월 금융감독원·기획재정부·한국은행 등과 함께 디지털 통화 제도화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에 대한 정확한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관련 사업자나 거래소 등이 투자금을 받고 사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해서다. 이 TF는 가상화폐에 대한 정의, 거래소 등록제와 자금세탁 방지, 외환 규제 등을 논의해 오고 있다.

 금융위는 다음달쯤에는 가상화폐와 관련한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일단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상화폐 거래소를 전자금융거래법상의 전자금융업자로 등록하도록 할 계획이다. 전자금융업자는 금융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등록이 가능하다. 일정 수준의 서버를 갖추고 재무건전성을 확보해야 하며, 예수금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인터넷 망과 분리된 곳에 80% 이상을 보관하도록 의무화한다.

 피해 보상 재원으로 자본금은 10억원(잠점) 이상 수준에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연준 금융위 과장은 “섣불리 규제를 도입하면 산업의 혁신을 막을 수 있다”며 “해외 사례를 참고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가상화폐 거래소인 코인원의 차명훈 대표는 “한국에선 법 테두리 안에 있어야 고객들이 안심하고 거래를 한다”며 “지금은 적절한 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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