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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의 미주알고주알] 씁쓸한 '알파고'의 완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 '미주알고주알(바둑알)'은 바둑면에 쓰지 못한 시시콜콜한 취재 뒷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다루는 코너입니다. ‘일기’ 컨셉이라 긴장 풀고 편하게 쓸 작정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사가 아닌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글입니다. 신문에서 쓰지 못한 B컷 사진과 취재 현장에서 찍은 셀카도 함께 올립니다. :-)



⑨ 씁쓸한 '알파고'의 완승…알파고vs커제

알파고와 대국하는 커제 9단. [사진 구글 딥마인드]

알파고와 대국하는 커제 9단. [사진 구글 딥마인드]

23일 중국 저장(浙江)성 우전(烏鎭)에는 아침부터 비가 왔다. 한국에서 우산을 깜박하고 들고 오지 않았는데, 어디서 우산을 사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급한 대로 대충 종이를 뒤집어쓰고 국제 컨벤션센터로 향했다.

오늘은 세계 바둑 최강으로 꼽히는 중국의 커제(柯潔)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대결이 열리는 날이다. 대결에 앞서 오전 10시, 행사장에서 개막식이 열렸다. 에릭 슈밋 알파벳 회장과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와 선수 등이 행사장에 참석했다.

개막식 장면. [사진 구글 딥마인드]

개막식 장면. [사진 구글 딥마인드]

개막식에서 커제 9단. [사진 구글 딥마인드]

개막식에서 커제 9단. [사진 구글 딥마인드]

개막식에서 에릭 슈밋 알파벳 회장은 "지난해 이세돌 9단과 알파고 대결에서 누가 이기던 인간의 승리라고 말한 적 있다. 이번 대회 역시 마찬가지다. 승부를 떠나 인간과 AI의 협업 가능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맞다. 슈밋 회장의 말을 들으니 1년 전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당시 나는 이 말을 듣고 참 묘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구글 측의 여유가 느껴져서 왠지 불안하다고 느꼈던 것도 기억난다. 그 불안은 곧바로 현실로 드러났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첫 승리를 거두던 날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년이 지난 오늘, 분위기는 너무 달라졌다. 승부에 대한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경악스럽고 공포스러웠던 알파고도 이제는 익숙한 존재가 됐다. 다만, 알파고가 그간 얼마나 더 성장했을까는 여전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리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대국을 시작하는 커제 9단. [사진 구글 딥마인드]

대국을 시작하는 커제 9단. [사진 구글 딥마인드]

오전 11시 반, 드디어 대국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아자황 박사가 대리 착점자로 나섰다. 알파고는 예상대로 55ㆍ84수 등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수를 여러 차례 선보였다. 알파고의 착점 속도가 지난해보다 빨라진 것도 눈에 띄었다.

커제 9단은 대국 내내 여러 번 자세를 고쳐 앉으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자황 박사가 알파고의 수를 착점할 때마다 심리적 동요가 커제 9단의 얼굴에 드러났다. 커제 9단은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머리를 감싸 안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행동을 반복했다.

괴로워하는 커제 9단. 

괴로워하는 커제 9단.

오후 3시30분쯤 커제 9단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묻어났다. 몇 분 뒤 이 대국은 289수 만에 알파고의 1집 반 승리로 끝이 났다. 대국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왜 웃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커제 9단은 “끝내기에서 승부는 이미 결정됐는데 나는 계속해서 의미 없는 수를 두고 있었다. 너무 절망적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고 털어놨다. 이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커제 9단의 심경이 이해가 됐다.

이어 커제 9단은 "알파고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사람 같았는데 이제는 '바둑의 신' 같다. 알파고와 프로기사가 어느 정도 기력 차이가 나는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앞으로 알파고를 바둑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대국이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 현장. 

대국이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 현장.

알파고의 버전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이에 대해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는 "현재 대국한 알파고는 기보를 기초적으로 학습한 다음에 자기 학습을 통해 기력을 강화한 버전"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등판한 알파고가 기보 입력 없이 탄생한 새로운 버전이라는 항간의 추측을 부인한 것이다.

기자회견장 전경.

기자회견장 전경.

오늘 대국 결과는 많은 이들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예상했던 결과가 그대로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다. 1년 사이 알파고는 감히 대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됐다. AI와 사람의 격차는 그만큼 더욱 벌어졌다.

에릭 슈밋 회장은 사람과 AI의 협업을 말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AI에 대한 호감보다는 반감이 더 크다. 아직 AI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돼 있지 않다. 그런 나에게 슈밋 회장의 말은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AI가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있다. 알파고는 그러한 변화의 첫번째 신호탄이었다. 알파고가, 아니 AI가 과연 슈밋 회장의 말대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긍정적 에너지로 작동할까. 그건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우전(중국)=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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