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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매너티에 돼지·코끼리 혼합 … 억울하게 생긴 얼굴 상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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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옥자’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봉준호 감독이 19일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제작비를 투자한 넷플릭스로부터 “글자 하나 바꾸란 요구가 없었다”고 밝혔다.

‘옥자’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봉준호 감독이 19일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제작비를 투자한 넷플릭스로부터 “글자 하나 바꾸란 요구가 없었다”고 밝혔다.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가 10년 업어 키운 슈퍼 돼지 옥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렇게 애틋했을까.

칸영화제 봉준호 감독 #옥자 구하려 다국적 기업과 대결 #거침없는 소녀 미자는 ‘여자 코난’ #생명체 분해하는 거대한 축산공장 #그 광경 보고 한 달간 고기 못 먹어 #제작비 부담에 넷플릭스 투자 받아 #논란 있지만 간섭 없이 마음껏 찍어

19일(현지시간) ‘옥자’의 제70회 칸영화제 공식 상영과 기자간담회에 이어 20일 한국 취재진을 따로 만난 봉준호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조금만 툭 건드려주시면 하고 싶은 말이 폭포처럼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두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다. ‘옥자’에 대한 현지 반응은 “이런 영화를 온라인으로만 본다는 것은 엄청난 낭비”(가디언)라는 호평과 감독의 명성에 비해선 기대에 못 미치는 범작이라는 평이 엇갈렸다. 영화 전문지 스크린인터내셔널이 발행하는 20일자 스크린 데일리에서는 평균 평점 2.3점(4점 만점)을 받았다.

19일 첫 기자 시사에서 상영 사고가 있었다.
“영화제에서는 늘 자주 있는 일이다. 오히려 기뻤다. 오프닝신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담았는데, (영화 상영이 처음부터 재개되면서) 기자들이 이를 두 번 볼 수 있었다.”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개막일 “극장 상영하지 않는 (넷플릭스) 영화는 황금종려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심사위원장으로서 ‘옥자’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기보다는 극장 문화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거라고 생각한다. 난 어릴 때부터 그의 광팬이다. 그가 (심사를 위해) 내 영화를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해피하다(웃음).”
어떻게 넷플릭스로부터 제작비 5000만 달러(약 560억원)를 전액 투자받게 된 건가.
“일단 한국 투자사들은 접촉하지 않았다. 500억원이 넘어가는 부담스러운 예산이잖나. ‘옥자’를 한국에서 투자받게 되면 내 동료들의 영화 50~60편이 ‘스톱’된다. 미국에서도 투자 과정이 쉽지 않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같은 감독들과 일하는 진취적인 회사들은 ‘옥자’ 시나리오를 되게 좋아했지만 예산 이야기를 들으면 버거워했다. 전통적인 대형 스튜디오들은 돈은 충분한데 시나리오를 불편해 했다. ‘E.T.’ 처럼 만들자고 하거나. 그렇게 방황하던 차 넷플릭스의 100프로 서포트를 제안 받았다.”
넷플릭스의 간섭이 전혀 없었나.
“글자 하나 바꾸란 요구가 없었다. 이런 예산의 영화가 100프로 감독의 비전을 보장하는 일은 드물다. 아직 기존 극장 산업과 (넷플릭스의) 디지털 스트리밍 배급 형태 사이에 여러 논란이 있지만, 크리에이터로서는 긍정적인 기회였다. 만약 넷플릭스의 이런 방침이 아니었다면 ‘옥자’는 지금과 다르게 이상한 영화가 됐을 수도 있다. 미자가 도살장에서 축산업의 현실을 목도하는 대신, 막 달콤한 노래나 부른다거나.”
‘옥자’는 산골소녀 미자가 친구이자 가족인 슈퍼돼지 옥자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담았다. [사진 넷플릭스]

‘옥자’는 산골소녀 미자가 친구이자 가족인 슈퍼돼지 옥자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담았다. [사진 넷플릭스]

옥자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했나.
“처음 상상할 때부터 덩치는 큰데 되게 내성적인, 억울하게 생긴 얼굴을 상상했다. 미국 플로리다에 가면 ‘매너티’라는 해양 동물이 있다. 정말 순하게 생겼다. 여기에 돼지·하마·코끼리 등을 섞었다. 옥자의 섬세한 감정 표현은 에릭 얀 드 보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은 분이다.”
옥자를 구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 맞서는 미자의 액션 장면들은 슈퍼 히어로물로 보일 만큼 강인하게 묘사된다.
“‘미래소년 코난’이란 만화가 있는데 주인공 코난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장면이 많다. 코난의 여자아이 버전을 만들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미자는 산에서 자란 아이잖나. 옥자가 동물인데 사람 같은 면이 있다면 미자에겐 산짐승 같은 면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짐승처럼 돌진할 수 있는. 누구도 이 아이를 막을 수 없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안서현 양이 얼굴에서 뿜어내는 에너지, 눈빛 자체에도 그런 느낌이 있다.”
이름이 옥자인 이유는.
“같은 이름을 가진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가장 촌스러운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그런 이름을 가진 동물이 뉴욕 맨해튼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의 동물이라는 것은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저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안 어울리는 것의 조합을 좋아한다.”
여정의 클라이막스인 도축장 장면이 아주 충격적이다.
“촬영 전 최두호 프로듀서와 미국 콜로라도의 거대한 축산공장에 갔는데 정말 압도적이었다. 잠실운동장보다 더 큰 공장에서 하루에 수 천, 수 만 마리가 죽어 나간다. 보통 공장은 조립을 하는데, 이 공장은 이미 완성된 생명체를 하나하나 분해한다. 그 후 한 달 정도 고기를 못 먹었다. 동물 짝짓기 장면도 극영화에선 아마 처음인 것 같다. 동물도 취향이 있고 늘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서 억지로 교배를 한다.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가. 동물도 우리와 함께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피로와 고통이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라면.
“육식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동물도 동물을 먹잖나. 단지, 동물들이 대량 생산 시스템의 제품으로 포섭돼 버린 지금의 자본주의 시대가 문제다. 1㎡가 안 되는 우리에서 고통스럽게 자란 돼지들이 거대한 공장형 도살장에서 금속 기계로 분해된다. 동물들이 풀밭에서 자연스럽게 자랐고 먹을 만큼 도축했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옥자의 목소리에 숨은 비결이 있다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배우 이정은씨다. 휠체어 탄 환자 역으로 영화에도 특별출연했다. 옥자 목소리 연기를 위해 ‘하루 종일 돼지 다큐멘터리를 봤다’면서 죄송할 만큼 깊이 몰입해주셨다. 돼지 소리는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내야 한다. 거기에 감정까지 실어야 하니 정말 힘들었을 텐데, 섬세하게 표현해 주셨다. 연기가 필요한 부분은 이정은씨가 하고, 나머지는 ‘설국열차’를 함께한 ‘반지의 제왕’ 시리즈 사운드 디자이너 데이브 화이트헤드가 작업했다. 뉴질랜드·호주의 특수 종 돼지들의 다양한 소리를 따서 이정은씨의 목소리 연기와 믹싱했다.”

한편 안서현은 실제 동물이 없는데 어떻게 감정 연기를 했냐는 질문에 “집에 ‘랑이’라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또 제 오빠도 푸근하고 저와 소통한다는 측면에서 옥자와 닮은 면이 있다. 강아지와 오빠의 느낌을 함께 떠올리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봉준호의 오랜 파트너인 변희봉은 “배우 생활을 오래 했지만, 칸에 온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꼭 벼락 맞은 사람 같고, 70도로 기운 고목에 꽃이 핀 기분”이라고 말했다.

칸(프랑스)=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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