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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자본주의 시대를 돌진하는 광란의 카니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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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올해 제70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최대 스캔들을 빚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가 5월 19일 프랑스 칸 현지에서 뜨거운 데뷔전을 치렀다. 시작은 야유였으나, 그 끝은 기립박수였다.

사진 /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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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는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슈퍼 돼지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 맞서는 모험을 그린다. 봉준호 감독 역대 최고인 제작비 5000만 달러(약 560억 원) 규모 블록버스터인 데다, 데이비드 핀처, 우디 앨런 등의 작가주의 감독들과 호흡을 맞춰온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 배우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할 등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가세했다. CG 캐릭터 옥자가 2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 내내 출연하며 소녀 미자와 교감해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였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가득한 이 영화를 ‘칼질’ 없이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

제70회 칸국제영화제 현지 리뷰

이때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 플랜B와 미국 기반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Netflix)가 공동 제작하겠다며 나섰다. “넷플릭스는 아무런 제약 없이 100프로 자유를 줬다. 이 정도 큰 예산에 간섭 없이 감독의 비전을 존중하는 영화사는 드물다. 정말 행복한 작업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말이다.

야유 속 첫 공개, 상영 중단 그리고 극적 반전
칸영화제에서의 공개 과정도 제작 과정만큼 드라마틱했다. 오전 8시 30분 영화가 사상 처음 공개된 프레스 스크리닝. 잘못된 마스킹으로 스크린 상단부가 가려 보이지 않자, 취재진이 불만을 터뜨렸고 결국 8분 만에 상영이 중단됐다. 극장 개봉이 아닌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전제로 한 넷플릭스 자체 제작 영화가 올해 최초로, 그것도 두 편이나(‘옥자’와 노아 바움백 감독의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 개막 전부터 논란이 된 터다. 황금종려상은 영화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칸영화제 최고 권위 상. 이에 프랑스 극장 협회는 후보 선정에 강력히 반발했고, 칸영화제 측은 2018년부터 프랑스에서 극장 개봉하는 영화만 경쟁 부문에 초청하겠다는 새로운 규정을 발표하며 무마했다.

우여곡절 끝에 ‘옥자’가 첫 공개됐다. 일각에선 얼마나 잘 만든 영화인지 두고 보자는 시선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19일 프레스 스크리닝에서 기술적인 문제 해결 후 약 10분 만에 영화가 재개되자, 객석에선 “최신 기술력 넷플릭스 영화의 상징적인 극장 사고”라는 비아냥거림도 들려왔다. 그러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를 즈음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사진 /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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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대를 돌진하는 광란의 추격전
인상적인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 미야자키 하야오, 팀 버튼 등 거장 감독들의 모험 영화에 견준 찬사다. ‘옥자’를 한 마디로 하면 자본주의 시대를 돌진하는 광란의 카니발이라고 할까. 옥자를 이용해 극비리에 유전자 조작 돼지의 대량 생산을 꾀하는 다국적 기업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일당과 그들로부터 옥자를 되찾으려는 미자, 신사적인 청년 제이(폴 다노)가 이끄는 과격 동물 보호 단체가 강원도부터 서울, 미국 뉴욕까지 숨 가쁘게 쫓고 쫓긴다.

추격전에 광기를 더하는 건 탐욕이다.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로 자신을 증명하려 안달하는 미란도와 미치광이 박사 조니 윌콕스(제이크 질렌할)의  슈퍼 돼지 퍼레이드는 싸고 맛 좋은 ‘자연산’ 돼지라는 거짓 광고로 뉴욕 시민을 현혹한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2013)에서 기괴한 냉혈한 메이슨 총리 역을 맡아 틀니 신공을 보였던 틸다 스윈튼은 이번 영화에선 교정기를 끼고 자본주의의 가식적인 미소와 음험한 본성의 두 얼굴을 열연한다. 낙오자가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미어캣처럼 겨드랑이 땀을 폭포수처럼 뿜어내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고막을 긁어대는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슈퍼 돼지가) 자연산이란 선의의 거짓말은 내가 아니라 소비자들 탓이야. 워낙에 유전자조작 제품을 싫어하니까.” 웃음기 하나 없이 오만한 미란도의 대사들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양면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풍자적인 웃음을 선사한다. 외신으로부터 가장 큰 호응을 자아낸 것도 이런 대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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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전사와 봉준호표 아날로그 액션 미학
어린 미자는, 그들의 허세 가득한 부(富)와 권력의 장막을 옥자에 대한 순수한 우정 하나만으로 정면 돌파한다. 미자가 굳게 닫힌 유리문을 있는 힘껏 부딪혀 깨부수고, 옥자가 갇힌 덤프트럭에 매달렸다 나뒹구는 장면들은 흡사 슈퍼 히어로 영화의 액션 전사를 보는 듯 짜릿하다.

여기에 미자를 돕겠다고 나선 동물 보호 단체의 아날로그 액션이 가세한다. 다소 맹목적이지만 이타적인 이상을 쫓는 이들의 젊은 육체는 중무장한 미란도 일당의 부대를 탄력적으로 막아낸다. 서울의 지하상가에서 옥자에게 날아드는 마취 총을 형형색색 우산으로 방어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행인들이 옥자를 피해 도망치는 시퀀스는 봉준호 감독이 전작 ‘괴물’(2006)을 자가 패러디한 듯 닮았다). 꼭 결정적인 순간에 삐끗하며 페이소스를 배가하는 봉준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이들의 장면이다.

'괴물'과 '설국열차' 사이에서 
야심차게 선보인 옥자 캐릭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다. 사실상 ‘옥자’ 프로젝트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이 하마를 닮은 슈퍼 돼지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하며 관객을 무리 없이 여정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다. “동물들도 우리와 함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피로와 고통이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봉준호 감독의 이러한 의도는 옥자가 윌콕스 박사의 연구실에서 끔찍한 짓을 당하는 대목 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주 클로즈업되는 옥자의 눈빛에 서린 불안과 절망, 안도는 극 중 미자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 모험담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견인차 구실을 한다. 그 종착역은 아주 단순하고 심도 깊은 질문이다. 이 혼탁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인가. 봉준호 감독이 택한 엔딩은 중의적이다. ‘괴물’과 ‘설국열차’(2013) 사이 어디쯤이라고 할까.

사진 /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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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평가 속 수상 가능성은
드라마가 축적될수록 더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은 ‘옥자’가 가진 미덕이다. 거꾸로 말하면 오프닝신에서 그저 평화롭게만 묘사되는 옥자와 미자, 할아버지(변희봉)의 두메산골 일상 등 초반부가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옥자와 미자의 애정도 목숨을 건 구출극의 도화선이 될 만큼 끈끈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둘의 우정에 공감하기 시작한 건, 동물 보호 단체가 끼어들고 미자의 추격전이 뉴욕으로 무대를 옮기고 나서부터다.

재미있는 것은 “생소하고 아름다운 절경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었다”는 어느 노르웨이 기자의 말처럼, 이 오프닝신은 해외 관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 어느 프랑스 기자는 강원도가 어떤 곳이냐고 궁금해 하기까지 했다. 6월 29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190개국에 동시 공개되는 ‘옥자’의 나라마다 다른 반응이 기대되는 이유다.

19일 오후 7시, 레드카펫 행사와 함께 열린 공식 상영은 4분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올드보이’(2003, 박찬욱 감독) ‘부산행’(2016, 연상호 감독) 등이 칸에서 받은 10분 가까운 환호에 비하면 짧은 편. “‘살인의 추억’(2003) ‘괴물’ 등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보다는 평범하다는 지적”(버라이어티)도 있지만 우호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별 다섯 개 만점을 선사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아름답고 스펙터클한 영화를 (큰 스크린이 아닌) iPad로만 본다는 건 엄청난 낭비다!”

분명한 사실은, 올해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영화는 황금종려상에 적절치 않다”며 휘발유를 끼얹은 ‘넷플릭스 영화’ 논란에 ‘옥자’가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28일 폐막식에서 가려질 수상 결과가 주목된다.

프랑스 칸=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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