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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연골 고치는 미세로봇, 김 안 서리는 렌즈 … 모두 나노기술의 마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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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나노로봇이 인체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탐지한 뒤 격멸하는 모습을 묘사한 개념도.

나노로봇이 인체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탐지한 뒤 격멸하는 모습을 묘사한 개념도.

1966년 미국에서 개봉된 공상과학(SF) 영화 ‘환상 여행(Fantastic Voyage)’은 독특한 상상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의사들이 분자 크기로 만들어진 잠수정을 타고 환자 몸속으로 들어가 혈류를 따라 항해한다. 이들은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핏덩어리에 도달한 뒤 이를 제거하면서 목숨을 살려낸다.

영역 넓어지는 초미세물질 활용 #1나노미터는 머리카락 10만분의 1 #1m와 1㎚는 지구와 축구공 차이 #방수·항균 성질의 물질 쪼개 코팅 #제품 성능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어 #보이지 않는 물질 다루기 위해 #현미경 기술도 발전, 원자시대로

50년 전 SF 영화에 등장했던 이 같은 상상이 오늘날 실제 구현되고 있다. 전남대 로봇연구소는 17일 “마이크로 의료 로봇을 이용해 손상된 관절 연골을 치료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소의 고광준 연구원은 “줄기세포 치료제를 탑재한 마이크로 로봇을 인체에 주입한 후 조이스틱을 이용해 손상된 연골 부위에 정확히 도달시키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크로 로봇은 얼마나 작기에 인체에 들어가고, 어떻게 조이스틱의 명령을 따를까. 그 비밀은 바로 ‘나노 기술’에 있다. 나노(Nano)는 10의 -9승(10억분의 1)을 뜻하는 접두어로 난쟁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했다. 1000을 나타내는 접두어가 ‘킬로’인 것과 같다. 1나노초(㎱)는 10억분의 1초,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를 뜻한다. 1㎚가 얼마나 작은지는 사람의 머리카락 굵기로 설명할 수 있다. 머리카락 한 개를 10만 가닥으로 쪼갰을 때의 한 가닥이 1㎚다. 물질을 쪼갠 최소 단위인 원자 3~4개의 크기가 대략 이 정도다. 1m와 1㎚의 차이는 지구와 축구공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와 새끼손가락 길이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반도체 메모리칩은 10나노급의 미세 공정 기술이 적용돼 집적률을 높였다.

반도체 메모리칩은 10나노급의 미세 공정 기술이 적용돼 집적률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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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기술에 대한 정의는 미국 과학재단(NSF)에서 국가나노기술계획 수립을 주도한 미하일 로코가 내린 정의가 가장 널리 인용된다. 그는 “나노 기술이란 1~100㎚ 크기의 물질을 다루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일반적으로는 “원자나 분자를 개별적으로 다루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거나 조작하는 기술”로 정의된다.

초미세물질을 마음껏 다루는 기술은 의학·제조업·환경보호 등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 우선 의학에 적용되면 인간 수명은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인체의 질병이 대부분 나노미터 수준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체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가공할 만한 나노기계인데 이러한 ‘자연의 나노기계’를 ‘인공의 나노기계’를 주입해 물리칠 수 있어서다. 전남대 로봇연구소가 이번에 개발한 마이크로 로봇은 연골을 재생시키는 치료제에 자성을 띤 산화철(Fe3O4) 나노 입자를 넣어 만들었다.

미국 IBM이 1990년 크세논 원자 35개를 배열해 쓴 회사 이름.

미국 IBM이 1990년 크세논 원자 35개를 배열해 쓴 회사 이름.

고광준 연구원은 “치료제를 주사로 인체에 주입하고 외부에서 자기장을 유도하면 나노물질들이 치료제와 함께 손상된 연골 조직에 정확히 도달돼 치료 효과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의학에서의 나노 기술은 외과적 통제 수준을 분자까지 확대하는 것이어서 이론적으로는 나노의학이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은 없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분자 수준의 외과 치료를 할 수 있어서다.

제조업에서도 나노 기술 활용이 활발하다. 10개에서 수천 개 정도의 원자로 구성된 물질을 나노입자라고 하는데, 제품의 표면에 나노입자를 입히면 얇은 층을 형성해 제품 성능을 향상시킨다. 예를 들어 물을 밀어내는 성질이 있는 산화티타늄 나노입자로 코팅하면 김이 서리지 않는 유리나 렌즈를 만들 수 있다. 항균물질인 은 나노입자는 휴대전화나 콘돔 등에 항균성 재료로 쓰인다. 나노입자를 입힌 비닐 마루 재료는 긁혀도 흠집이 나지 않고 찢어지지도 않는다. 스키나 스노보드에 원자를 얇게 입히면 얼음이 달라붙지 않고 우주비행선 연료 첨가제, 로켓에도 나노입자를 입히면 성능이 배가된다. 산화티타늄이나 산화아연의 입자는 자외선을 막는 선크림에 사용되고, 이산화규소 결정을 활용한 나노복합소재로는 테니스 라켓을 만들 수 있다.

항균성이 뛰어나다는 은 나노입자의 모양.

항균성이 뛰어나다는 은 나노입자의 모양.

나노 기술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먼저 상향식 공정 기술은 나노미터 크기의 기본 구성 물질을 만든 다음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기본 구성 물질 몇 개를 결합해 큰 구조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일본전기(NEC) 부설 연구소의 이지마 스미오 박사가 발견한 탄소나노튜브가 대표적이다. 과학기술 저술가인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은 “탄소 6개를 원통형으로 연결한 이 구조물은 지름 0.5~10㎚의 크기인데 강도가 철강보다 100배 뛰어나고 전기 전도도는 구리와 비슷해 활용도가 무척 높다”고 말했다. 가벼우면서 강한 골프채·야구방망이 등에 탄소나노튜브가 활용된다.

반대로 하향식 공정 기술은 이미 존재하는 거시 물질에서 출발해 점차 크기를 축소해 가면서 원자나 분자 크기의 구조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반도체 제조 공정이 이 방식을 사용한다. 반도체 집적회로를 만들 때 원자들이 고르게 놓여 있는 실리콘 기판 위에 수없이 많은 똑같은 트랜지스터를 그려 넣는데 많이 그려 넣을수록 반도체의 용량이 커진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업계 최초로 10㎚ 공정을 이용한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다.

신현수 삼성전자 홍보실 과장은 “웨이퍼에 그려 넣는 회로의 간격을 머리카락 한 올을 1만 가닥으로 나눈 정도로 촘촘하게 그려 넣은 것이 성능을 높인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이 같은 나노 공정 기술을 바탕으로 30년간 반도체칩 분야 세계 1위였던 인텔을 제치고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가 됐다. 삼성전자는 현재 10나노를 넘어 8나노 공정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나노 기술이라는 아이디어가 인류에게 최초로 제시된 건 1959년 미국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먼 교수가 ‘바닥에는 풍부한 공간이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면서다. 이 연설에서 파인먼 교수는 브리태니커 사전 24권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을 하나의 핀 머리에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렸지만 현재는 손톱만 한 64기가 낸드 플래시메모리 칩 안에 일간신문 800년 치를 저장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물질을 다뤄야 하는 나노 기술은 필연적으로 현미경의 발전과 속도를 같이한다.

가시광선을 이용하는 광학현미경은 물체를 선명하면서도 크게 보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시광선 대신 전자를 이용한 전자현미경이 개발됐다. 전자의 이동 경로를 휘어지게 해 마치 볼록렌즈가 빛을 모으는 것처럼 전자를 모아 물체를 확대하는 원리를 이용했지만 전자현미경은 아주 얇은 재료를 진공에서만 볼 수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된 게 원자현미경이다. 원자현미경은 불이 꺼진 방에서 손을 더듬어 물체의 전체 모양을 알아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원자현미경이 나오면서 과학계와 산업계는 나노 크기의 물질을 측정하고 조작하기 한결 수월해졌다.

우주 가는 엘리베이터 건설 … 탄소나노튜브 개발로 탄력

고층 빌딩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쉽게 올라가듯 지구에서 우주로 엘리베이터를 놓는 일이 실제 추진되고 있다. 여기에도 나노 기술이 바탕이 되고 있다. 엘리베이터는 과학 소설가인 아서 클라크(1917~2008)가 1979년 펴낸 『낙원의 샘』이라는 소설에서 처음 묘사됐다.

이 엘리베이터가 현실이 되려면 가벼우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줄이 개발돼야 하는데, 탄소 6개를 결합해 만든 탄소나노튜브가 발견되면서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탄소나노튜브는 머리카락의 1000분의 1 정도 굵기로 자체 질량의 5만 배나 되는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 이런 엘리베이터 개발이 추진되고 있긴 해도 시간이 꽤 걸릴 전망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주최한 한 회의에선 2060년께나 우주 엘리베이터 건설이 가능할 것이란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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