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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클라인의 블루: 색의 전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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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눈에 선하다. 지난달 매장에서 본 파란색 외투가 참 인상적이었다. 봄이면 매번 고민하는 외출복의 선택. 그 옷은 이런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줄 것 같았다. 기품 있는 매무새에다 내 얼굴을 환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파란색 옷을 사지 못했다.

함께 쇼핑을 간 친구 때문이었다. 다이애나비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새파란 외투를 입고 대중 앞에 나왔을 때 얼마 안 가 죄다 이혼을 했다며 말렸다. 영국의 왕세자비 미들턴이 최근 로열블루 빛 의상으로 얼마나 센세이션을 일으키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꺼림칙했다. 파란 옷이 이별을 불러들인다는 속설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탐이 났지만 그 옷을 택하지 못한 다른 이유는 특정 정당을 상징하는 색 때문이었다. 당시가 대통령선거 전이라 각 정당 출신의 후보자들이 제각각의 색을 내세워 치열하게 캠페인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 옷으로 모임에 나가면 십중팔구 나는 그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더없이 자유로워야 할 나의 창작활동이 정치적 이념에 묶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브 클라인, ‘Blue’, 1960.

이브 클라인, ‘Blue’, 1960.

그 옷을 선택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이브 클라인(Yves Klein, 1928~62) 때문이다. 파란색에 관한 한, 그를 능가할 미술가는 없다. 1950년대 중반 클라인은 그만의 파란색을 개발해 회화와 조각을 제작했고 퍼포먼스도 했다. 그의 파랑은 울트라마린(Ultramarin) 계열의 깊고 진한 색이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 색을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B)로 명명하고 특허를 받기까지 했다.

온통 파랑으로 균일하게 뒤덮인 캔버스와 조각물로 그는 이미 10년 뒤 미국에서 맹위를 떨칠 미니멀 미술을 예견했고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내주었던 현대미술의 주도권을 프랑스로 되돌리는 미술가로 꼽혔다. 클라인 식의 파란 외투를 입고 내 작업실을 들락거린다면 내 작품이 주눅 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파랑의 강렬한 기세가 내 생활과 그림 그리기를 사로잡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클라인에 의하면 “파랑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하는 색”이란다. 하늘과 바다는 왜 파란색일까? 유리컵에 담긴 물과 빈 유리잔은 투명하지만 그 속의 것이 바다를 이루고 하늘을 이룰 때 파랑으로 보이게 된다. 다른 색보다 파장이 짧은 파랑이 물 분자나 기체 분자와 충돌하면서 다른 빛보다 더 많이 반사하는 산란현상 때문에 바다와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고 한다. 클라인의 블루는 이런 비가시적인 것을 강하게 드러내는 파랑의 힘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 같다.

짙은 파랑의 한 종류인 울트라마린은 “바다 건너편”에서 온 색이란 뜻이다. 중세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순수한 파란색을 먼 바다를 건너 수입해온 청금석(lazuli)에서 얻었다. 그만큼 파란색은 귀하게 취급되었다. 파랑은 고대로부터 현실에서 감지하기 힘든 대상이나 초월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 쓰여왔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파랗게 묘사되고 중세의 성화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는 파란 옷을 입은 것으로 표현된다.

비가시적이고 초월적이기에 파랑은 현실의 격정에 머물지 않고 이성적 합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파랑을 선호한다. 5년 전 한나라당은 30여 년간 보수정당이 써온 파랑을 버리고 빨강을 당의 상징색으로 채택했다. 그런가 하면 3년 전 새정치민주연합은 15년간 진보정당이 써온 초록과 노랑을 버리고 경쟁 정당이 사용했던 파란색을 상징색으로 채택했다. 색을 차지하고 버리는 식이다. 보수정당이 오랜 전통의 색을 버리고 정반대 편의 색인 빨간색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가 하면 진보정당은 경쟁자가 버린 파랑으로 이번에 정권을 잡았다.

색이란 누군가 점령해 갖는 영토와 같다. 누군가 차지하기를 기다리는 땅과 같다. 클라인이 차지한 파란 영토는 그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어 아무나 그 영역에 들어가 쓸 수 없다. 그는 그의 색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는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다. 앞으로 파란색의 정치적 주인은 수없이 바뀔 것이지만 울트라마린으로 가득한 창공은 그것을 우러러보는 사람과 그 속을 나는 새가 차지한다.

전수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