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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통령의 성공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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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엊그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의 첫 48시간은 우리 민주주의 30년의 역사와 성취를 압축적으로 따라잡는 시간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들은 과거의 유산인 제왕적 대통령을 해소하고, 시민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정부를 정착시키기 위해 분투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간소하고도 격의 없는 취임식, 방송 카메라 앞에 직접 나서 총리 지명자와 비서실장을 발표하는 (너무나 당연한) 새로운 형식을 통해 시민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가고 있다.

첫 번째 동심원인 작은 청와대는 #젊고 정직한 메신저들로 채우고 #오히려 둘째 동심원인 내각에 #가장 신뢰하는 인물들 임명해야 #책임과 권한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일하는 정부가 작동한다

전임 대통령이 모래 벽돌로 쌓아 올린 권위적 피라미드의 저 높은 곳에서 일방적 지시로 일관했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은 마치 낮은 곳을 찾아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시민들과의 소통, 탈권위 정치를 지향하고 있다. (오래전 중국의 노자는 가장 훌륭한 것은 곧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물이고 물이야말로 도(道)에 가장 가깝다고 하였다. 『도덕경』 8장)

새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대다수 시민처럼 필자 역시 문재인 행정부의 성공과 더불어 대한민국이 복합 전환의 계곡을 건널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 한 개인의 맑은 기운, 섬기는 리더십 스타일만으로 스마트 IT 경제로의 전환의 계곡, 미·중 G2 시대에 한반도 평화의 추구,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사회경제적 격차의 계곡을 건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 대통령 개인의 진솔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은 두 가지 동심원을 그리며 확산되어야 한다. 첫째, 작은 청와대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고, 부드러운 소통형 리더십으로 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숱하게 경험한 바와 같이 제왕적 대통령의 일차적 뿌리는 비대하고 군림하는 청와대였다. 청와대 참모들이 내각과 여당, 공직 사회 위에 군림하는 무기는 바로 대통령의 신뢰, 대통령에 대한 접근성, 정보의 독과점이었다. 이에 필자와 중앙일보 리셋 코리아 정치분과는 새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의 폐습을 반복하지 않고 작은 청와대를 지향하는 가장 빠른 길은 민정수석과 경제수석이라는 핵심 요직 자체를 아예 폐지하는 것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백 보를 양보해서 당장 주요 수석들을 폐지할 수 없다면, 청와대 참모진에는 대통령의 신뢰를 크게 받고 있다고 알려진 인물들을 배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관들이 눈치를 보게 되는 중량급 실세 참모들보다는 젊고 정직한 메신저들로 참모진을 꾸릴 때 작은 청와대는 현실화되고, 문 대통령의 섬기는 리더십은 내각과 공직 사회로 확산될 수 있다. (지금까지 발표된 세 명의 대통령 수석비서관이 이전 정부의 대통령 참모들보다 다소간 젊은 것은 분명하다.)

둘째, 장관들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 위임과 책임 지우기의 균형이 정부 운영의 중추가 되어야 한다. 작은 청와대가 낮은 자세로 소통하는 대통령의 첫 번째 동심원이라면, 두 번째 동심원은 대통령의 정책을 실행하는 내각이다. 문 대통령이 선거운동 당시의 공약대로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려는 것은 정부 업무의 중심이 대통령-청와대 참모 축이 아니라 대통령-각부 장관 축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려는 것이리라.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이 책임장관제를 숱하게 공약으로 제시했지만 그것이 공염불로 끝난 까닭은 분명하다. 과거 대통령들은 책임에 부합하는 권한을 장관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별 권한이 없는 장관들은 대통령 참모들의 눈치 보기에 바빴고, 관료조직은 청와대의 시녀로 전락해갔다. 새로 출발한 문 대통령은 가장 신뢰하는 인물들을 청와대 참모가 아닌 장관으로 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일자리 확대(제1 공약), 재벌개혁(제3 공약), 교육·육아 국가책임제(제8 공약)를 추진하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책임과 권한이 균형을 이룰 때에 책임장관제는 가능하고, 책임장관은 실질적으로 관료조직을 이끌며 일을 해 나갈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일하는 정부가 작동하게 된다.

사실 필자가 지금까지 언급한 처방은 새로운 것이랄 것도 없는 내용들이다.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이 실패한 까닭은 이러한 처방을 접해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처방을 실천에 옮길 의지와 열린 태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대통령 연구자들은 성공하는 대통령 리더십은 무엇보다도 대통령 개인의 내적 균형감과 정서적 안정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해왔다. 문 대통령의 성공에 요긴한 것은 아마도 매일매일의 격무를 마치고 난 늦은 밤, 홀로 스스로를 대면하는 시간일 것이다. “낮은 곳을 찾아가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도덕경』 8장). 임기 첫 48시간에 문 대통령이 보여준 ‘흐르는 물의 리더십’의 요체를 매일 밤 되새긴다면 48시간의 산뜻한 출발을 넘어 5년 후에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장 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