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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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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신예리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신예리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날마다 두 개의 숫자와 함께 아침을 연다. 우선 눈 뜨자마자 확인하는 게 몸무게다. 소수점 이하 둘째 자리까지 나오는 디지털 체중계 위에 올라서서 계기판에 뜬 수치에 따라 점심 때 비빔밥을 먹을지, 크림 소스 파스타를 먹을지 정하는 식이다. 다이어트까진 못해도 종종 TV에 얼굴을 내미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상 살이 더 찌는 것만은 막으려는 거다. 출근길에 e메일로 체크하는 또 하나의 숫자는 시청률이다. 내가 맡고 있는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의 시청률 추이를 보며 기분이 갰다가 흐렸다가 춤을 추곤 한다.

미세먼지 풀겠다 외친 후보들, 중국·돈 문제엔 입 닫아 #‘선거 전’ 약속보다 ‘선거 후’ 설득의 리더십이 더 중요

얼마 전부턴 내 일상과 기분을 좌우하는 숫자가 하나 더 늘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미세먼지 얘기다. 매일 아침 휴대전화 앱이 알려주는 우리 동네 미세먼지 수치에 따라 환기를 할지 말지, 빨래를 돌릴지 말지가 결정된다. 며칠 내내 ‘나쁨’이던 미세먼지 농도가 마침내 ‘좋음’으로 떨어져 온 집 안 창이란 창은 죄다 열어젖힐 때면 거짓말 안 보태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지경이다.

미세먼지는 경쟁에 치이고 과로에 찌들어 최하위권을 맴도는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더욱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주범이다. 올해 1~3월 중 미세먼지 농도가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치를 넘어선 게 사흘에 이틀꼴이었다. 봄의 절정인 5월 들어서도 최악의 연속이다. 어른들도 안 됐지만 모처럼 집 밖에서 맘껏 뛰놀아야 할 연휴를 망치고 운동회마저 빼앗긴 아이들 모습이 딱하기만 하다.

이 와중에 서울시 교육청이 내놓은 미세먼지 종합대책조차 걱정을 더한다. ‘나쁨’ 예보 땐 모든 학생이 마스크를 쓰도록 지도한다는데 알고 보니 내달 초 유·초등학생 54만 명에게 교육용 마스크를 한 개씩 나눠주는 걸로 끝이란다. 사실 개당 1000원이 넘는 미세먼지 차단용 마스크를 매번 새걸로 갈아 씌워주는 게 중산층 가정에도 적잖은 부담이다. 자칫 소외계층 소녀들이 생리대가 없어 등교를 포기했던 것처럼 마스크를 못 쓴 게 부끄러워 학교에 빠지는 아이들이 생길까 염려스럽다. 예보가 더 나쁠 땐 수업 단축 또는 휴교를 추진한다는데 맞벌이 부부에겐 재앙이 될 수 있다.

“다른 건 됐고 미세먼지 하나라도 제대로 해결해 줄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고 싶다!” 북핵도, 일자리도 시급한 문제지만 미세먼지는 매일매일 전 국민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다 보니 자주 들었던 소리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고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서로서로 모범 답안을 베껴 쓴 건지 역대 어느 대선보다 후보 간 공약의 싱크로율이 높은 탓이다. 미세먼지 해법만 해도 다섯 명의 주요 정당 후보 모두가 석탄과 원자력 발전을 줄이고 신재생 에너지 비중을 높이겠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정작 중요한 중국 쪽 대책을 덮어둔 건 물론, 하나같이 돈 얘기는 쏙 빼놨다. 하지만 이들의 공약을 지키려면 전기료를 지금보다 최소 다섯 배는 올려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추산이다. 그렇다면 누굴 뽑아야 할까. 막연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답이 있긴 하다. 당선 후에라도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고 부담을 나눠 져 달라며 국민들을 진솔하게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미세먼지 외에도 백화점식 공약들 중에 양육비 지원을 늘리고, 청년수당을 대주고, 노령연금을 더 드리는 등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실천하려 해도 우리 주머니에서 큰돈이 나갈 참이다.

국민뿐 아니라 야당과 정부 관료들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살필 필요가 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취임 100일이 넘도록 큰소리 떵떵 쳤던 핵심 공약을 무엇 하나 변변히 못 지킨 걸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무슬림의 입국을 막는 반(反)이민 행정명령은 법원에서 줄줄이 제동이 걸렸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비용도 야당 반대로 끝내 예산안에 넣지 못했다. 파격적인 법인세 인하나 막대한 인프라 투자 계획도 앞으로 의회에서 발목이 잡혀 체면을 구길 공산이 크다.

선거일 아침이 밝았다. 각자 마음에 둔 후보가 ‘선거 전’ 어떤 공약을 외쳤는지보다 ‘선거 후’ 공약을 얼마나 잘 지킬 수 있을지를 따져 보시라. 미세먼지 해결도, 복지 확대도 결코 대통령 혼자선 못한다. 바다 건너 트럼프를 봐도 일이 되게 하는 건 결국 설득의 리더십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