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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바둑규칙 허점 많아 … AI 발전하면 정교해질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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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신간 『바둑룰의 이해』의 저자 김재업 울산과학기술원 물리학과 부교수. [우상조 기자]

신간 『바둑룰의 이해』의 저자 김재업 울산과학기술원 물리학과 부교수. [우상조 기자]

국내 바둑 인구를 보통 1000만 명이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 바둑 규칙을 정확히 알고 두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바둑 규칙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바둑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바둑 규칙은 여러 개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한·중이 덤과 계가법에 있어 다르다는 정도만 알지 구체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바둑 규칙은 각국에서 제각각 관리해 왔고 그마저도 제대로 정리된 자료가 없었다.

『바둑룰의 이해』 펴낸 김재업 교수 #국내 1000만 인구가 즐긴다지만 #정확히 알고 두는 사람 별로 없어 #한·중·일 계가법 등 차이 직접 정리 #공부해 보니 물리학 배울 때와 비슷

전 세계 바둑 규칙을 집대성한 책 『바둑룰의 이해』가 나왔다. 전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다. 이 책을 쓴 김재업(41) 울산과학기술원(UNIST) 자연과학부 물리학과 부교수를 최근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했다. 그는 “바둑을 두다 보면 기존 규칙으로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 있는데, 이를 정리한 자료조차 없다는 것에 불만이 생겨 직접 책을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바둑 규칙을 공부하면서 물리학을 배울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공부하면 할수록 난해한 연구 대상들이 등장해 깜짝 놀랐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한·중·일과 미국바둑협회, 응씨배 등 다섯 곳의 주요 바둑 규칙을 자세하게 정리했다. 그는 현존하는 바둑 규칙을 계가법에 따라 크게 둘로 분류했다. 집을 세는 계가법(한국·일본)과 집+돌을 세는 계가법(중국·미국바둑협회·응씨배)이다. 바둑 규칙은 이 둘을 기반으로 저마다 역사와 전통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며 발전해 왔다.

김 교수는 “기존 규칙들은 정의가 모호해 특정 분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며 “바둑 규칙은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이상적인 규칙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김 교수는 “기존 규칙들은 정의가 모호해 특정분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며 “바둑 규칙은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이상적인 규칙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김 교수는 모든 바둑 규칙이 허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존 규칙들은 정의가 모호하고 특정 상황의 분쟁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삼패빅·순환패·장생(長生) 등 동형반복이 계속돼 승부를 낼 수 없는 ‘판빅’과, 동형반복이더라도 무승부가 되지는 않는 모양을 구별하는데 동양권 룰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나은 바둑 규칙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김 교수는 “기존 바둑 규칙은 동형반복이 나왔을 경우 착수 금지를 유일한 해법으로 간주하는데, 나는 역발상으로 착수를 강제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가 제안한 안에 따르면 먼저 순서넘김을 ‘보통 순서넘김(P)’과 ‘대국 종료를 제안하는 순서넘김(E)’으로 구분한다. 그런 다음 특정 상황에서만 P를 허락하고 나머지 상황에서는 무조건 두게 한다. 특정 상황이란 패싸움에서 상대가 패를 따내 자신이 두고 싶은 곳은 착점 금지가 됐지만 바둑을 끝내고 싶지 않은 때를 말한다.

이 제안의 장점은 악의적으로 순서넘김을 남발해 대국을 지연시키는 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 김 교수는 “새로운 규칙을 대입해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기존 규칙에서는 문제가 발생했던 대국도 이 과정을 따르면 심판의 개입 없이 자체적인 종료 수순을 밟게 된다”고 설명했다.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재업 울산과학기술원 물리학과 부교수. [우상조 기자]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재업 울산과학기술원 물리학과 부교수. [우상조 기자]

김 교수에게 바둑 규칙은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연구 과제다. 그는 “앞으로 또 다른 아이디어를 조합하면 이상적인 바둑 규칙에 수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바둑 규칙은 ▶다수가 동의할 수 있고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며 ▶대국 종료 조건이 확실하고 ▶모든 대국 과정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의 허점은 기존 바둑 규칙의 허점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재 바둑 규칙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해 모든 대국 과정을 완벽하게 프로그래밍할 수 없다. 그런데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은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만 AI는 프로그래밍된 대로만 작동하기 때문에 패착을 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최정상급 프로기사라 해도 실전에서 양패빅이나 삼패, 사패 등을 만들어 AI의 이상현상을 유도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며 “단순히 AI를 꺾기 위한 방편으로 바둑 규칙의 허점을 연구하기보다는, 바둑 규칙을 학문적으로 연구해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바둑 규칙의 정교화와 AI 발달은 긴밀한 관계다. AI 발달의 전제 조건이 프로그래밍 언어의 정교화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정교화하기 위해서는 바둑 규칙이 정교화되어야 한다. 김 교수는 “보다 완성된 바둑 규칙을 AI한테 프로그래밍하는 과정 자체가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업 교수

울산과학기술원(UNIST) 자연과학부 물리학과 부교수. KAIST 물리학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석·박사. 도시 대항 국제수학 토너먼트 한국지부 위원장. 대면적 금속나노선 배열 신기술 개발 등. 아마 5단.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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