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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3·1 만세’ 세계 빙판 이런 기적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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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세계선수권에서 우크라이나를 꺾은 뒤 어깨동무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한국 대표팀 선수들. 아이스하키는 국가 대항전의 경우 경기가 끝난 뒤 승리한 팀의 국가만 연주한다. 맷 달튼(왼쪽에서 넷째)을 비롯한 귀화 선수들도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세계선수권에서 우크라이나를 꺾은 뒤 어깨동무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한국 대표팀 선수들. 아이스하키는 국가 대항전의 경우 경기가 끝난 뒤 승리한 팀의 국가만 연주한다. 맷 달튼(왼쪽에서 넷째)을 비롯한 귀화 선수들도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장면1=아이스하키 실업팀인 안양 한라는 1990년대 캐나다 전지훈련 기간 현지의 무명 팀과 연습경기를 했다. 결과는 1-8 패배. 알고보니 이 팀은 캐나다 동네 피자 배달원과 집배원들이 만든 동호회 팀이었다.

‘꿈의 무대’ 진출한 아이스하키팀 #백지선 감독 중심으로 똘똘 뭉쳐 #몸집 작아도 상어처럼 ‘빅 플레이’ #‘매년 75억’ 정몽원 회장 통큰 지원 #2부리그 준우승, 하키 역사 새로 써 #“진짜 기적, 내년 평창서 이루겠다”

#장면2=1996년 한라는 일본 실업팀 오지 제지에 교류 경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오지 제지는 “양팀의 전력 차가 너무 크다” 며 단칼에 한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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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스하키는 20년 전까지만해도 국제 대회에만 나가면 일방적으로 터지는 ‘동네북’ 신세였다. 위의 두 가지 에피소드가 말해주듯 실업팀의 전력도 아마추어 동호회 수준이었다. 2014년 4월 고양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2부리그) 경기를 앞두고 르네 파젤(67·스위스) 국제아이스하키연맹 회장은 “한국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망신을 당하면 우리 입장도 곤란해진다”며 우려했다. 한국은 그 대회에서 우크라이나에 2-8로 지는 등 5전 전패를 당하며 3부리그로 강등됐다. 결국 한국은 캐나다 동포 백지선(50·영어명 짐 팩) 감독을 영입한데 이어 귀화선수를 늘리는 비상조치(?)를 취한 끝에 조건부로 개최국 자동출전권을 따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2017년 4월 29일. 한국 아이스하키가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2부리그 최종전에서 우크라이나를 2-1로 꺾었다. 앞서 카자흐스탄(16위), 헝가리(19위), 폴란드(20위)를 잇따라 물리쳤던 한국은 3승1연장승1패(승점11)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을 차지한 오스트리아와 함께 한국은 내년 월드챔피언십(톱디비전) 진출권을 따냈다.

국가별로 수준 차가 큰 아이스하키는 세계선수권을 6부리그로 나눈 뒤 승강제 방식으로 치른다. 캐나다·미국 등 상위 16개국이 출전하는 월드챔피언십은 축구 월드컵 본선 같은 ‘꿈의 무대’다. 3부리그에 있던 팀이 2부를 거쳐 2년 만에 월드챔피언십에 오른 건 세계선수권 80년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다. 아이스하키 남자 성인 등록선수가 233명 밖에 되지 않는 데다 고등학교팀 6개, 실업 3개팀 밖에 없는 한국의 척박한 환경을 생각하면 기적 같은 사건이다.

환골탈태한 한국 아이스하키

환골탈태한 한국 아이스하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에서 활약했던 백 감독은 2014년 7월 한국 대표팀을 맡아 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했다. 이후 상황별 세부전술이 담긴 20쪽이 넘는 시스템북을 만들어 선수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선수들에게 “체격은 작더라도 빅(Big) 플레이를 펼치자”고 강조했다. 키 1m71cm의 신상훈(24·한라)은 헝가리전에서 직접 백보드를 맞힌 뒤 리바운드된 퍽을 슬랩샷으로 골로 연결하는 특급 플레이를 선보였다.

백 감독은 선수들에게 또 국가대표로서 자부심을 강조했다. 과거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던 라커룸에는 유니폼이 각이 잡혀 정리돼 있다. 대표선수들은 백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이동할 때면 트레이닝복 대신 정장을 입는다.

“귀화선수가 7명이나 되는 아이스하키팀이 무슨 대한민국 국가대표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엔 브락 라던스키(34)와 마이크 테스트위드(30·이상 한라)가 부상으로 빠졌고, 에릭 리건(29·한라)도 부상을 당해 최종전에 결장했다. 이번 대회 14골 중 11골은 한국에서 자라난 대표팀 선수들이 넣었다.

1부 리그인 월드챔피언십 진출이 확정되자 선수들을 껴안고 기뻐하는 정몽원 회장(가운데).

1부 리그인 월드챔피언십 진출이 확정되자 선수들을 껴안고 기뻐하는 정몽원 회장(가운데).

정몽원(62) 한라그룹 회장의 통 큰 지원도 한 몫 했다. 정 회장은 1994년 실업팀 만도 위니아(현 한라)를 창단했고, 1997년 외환위기 때도 팀을 지켰다.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에 취임한 그는 해마다 한라 아이스하키팀에 50억~60억원, 협회에 15억원을 출연했다.

2013년에는 핀란드 2부리그 키에코 완타의 지분 53%를 확보해 운영권을 인수했다. 10여명의 아이스하키 유망주들이 핀란드로 건너가 꿈을 키웠다. 이번 대회에서 2골씩을 넣은 신상훈과 안진휘(25·한라)가 핀란드에서 아이스하키를 배운 선수다. 정 회장은 “난 그저 판을 깔아줬을 뿐이다. 백 감독과 선수들이 잘해줬다”고 말했다.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대표팀이 30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금의환향했다. 대표팀 주장 박우상(오른쪽에서 여덟째)은 왼팔을 다쳐 깁스를 했다. 준우승 트로피를 든 선수는 부주장 조민호.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대표팀이 30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금의환향했다. 대표팀 주장 박우상(오른쪽에서 여덟째)은 왼팔을 다쳐 깁스를 했다. 준우승 트로피를 든 선수는 부주장 조민호.

한국은 평창올림픽에서 캐나다(1위), 체코(6위), 스위스(7위)와 함께 A조에 속했다. 힘겨운 승부를 앞두고 백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창올림픽 목표는 금메달이다. 모든 경기에서 이기는 거다. 국민들이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게 만들자.”

영종도=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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