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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의 원샷 야구] 허정협, 이제 그의 이름 석자를 기억해야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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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김원의 원샷 야구] 첫 번째 이야기

(허정협 홈런 영상)

'원샷--.' 

"이런 홈런은 박병호 선수나 때릴 수 있는 홈런이에요." (이효봉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

25일 프로야구 두산과 넥센의 경기가 열린 서울 고척스카이돔. 10-5로 넥센이 크게 앞선 5회 말 1사 1·3루 상황에서 넥센 5번타자 허정협(27)이 타석에 들어섰다. 허정협은 배트를 이리저리 돌리다 마운드 위 두산 김성배와 짧은 눈빛 교환을 했다. 그러곤 자세를 고쳐잡았다.

초구. 두산 포수 양의지는 양 발을 오른쪽으로 한 걸음씩 옮겼다. 그러곤 미트를 바깥쪽 낮은 코스에 갖다댔다.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슬라이더를 던지라는 뜻이었다.(허정협은 직구를 잔뜩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성배의 공은 가운데로 몰렸다. 실투였다. 놀란 건 허정협도 마찬가지였다. 타이밍을 빼앗긴 허정협은 재빨리 엉덩이를 빼고 무릎을 살짝 굽혀 반동을 주며 방망이를 휘둘렀다. 배트에 공이 맞은 순간 살며시 오른손을 떼며 스윙을 이어갔다.

배트 끝부분에 걸친 공은 높게 치솟았다. 한 눈에 봐도 빗맞은 타구였다. '어, 어, 어라' 타구의 발사 각도를 볼 때도 절대 홈런이 될 거 같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 날아오른 타구는 비행을 멈추지 않았고, 기어이 좌측 담장을 넘어갔다.(허정협은 운이 좋아 넘어갔다고 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이효봉 위원은 '와' '진짜' 감탄사를 연발하다 '박병호'의 이름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홈런을 친 뒤 축하를 받는 허정협. [일간스포츠]

홈런을 친 뒤 축하를 받는 허정협. [일간스포츠]

힘.  

"힘 하나는 진짜다."

넥센 동료들은 허정협을 '대만 용병'이라고 부른다. 이런 별명이 붙게 된 건 그가 대만의 4번타자 린즈셩의 외모를 닮았기 때문 만은 아니다. 린즈셩처럼, KBO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타자들처럼 '힘이 장사'라는 이야기다. 25일 두산전 홈런은 그가 가진 힘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줬다. 팬들도 이를 인정한다.

"관심을 가져 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그런데, 그 별명(대만 용병) 얘기는 이제 안했으면 좋겠어요." 허정협이 웃었다. 사실 허정협의 체격을 보면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1m84㎝·92㎏. 야구 선수 표준 체격에 가깝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소한 편이세요. 할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할아버지께서 풍채가 좋으셨거든요."

강병식 넥센 타격코치는 "손목 힘이 워낙 좋다. 하체가 발달돼 있어 중심이동이 뛰어나다. 전체적인 밸런스가 좋다"고 설명했다. 허정협은 올 시즌 넥센의 붙박이 우익수가 됐다. 허정협은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 출장했던 6일 사직 롯데전에서 4타수 2안타를 쳤다. 9일 잠실 두산전, 11일 고척 kt전에서 3안타(4타수)씩을 기록했다. 한 때 그의 타율은 0.692까지 치솟았다. 허정협이 맹타를 휘두르는 동안 지난해까지 넥센의 우익수 자리를 지켰던 외국인 타자 대니돈은 부진에 허덕이며 2군으로 내려갔다.

허정협은 19경기에 출전해 홈런 6개(타율 0.321, 17타점)를 기록 중이다. 3경기에 한 개꼴로 홈런을 터뜨리고 있다. 특히 21일 고척 롯데전부터 4개를 몰아쳤다. 6개 홈런 중 5개를 잡여 당겨 좌측 담장을 넘겼다. 왼손 투수에게 4개, 사이드암 투수에게 2개를 쳤다. 아직 오른손 투수에게는 홈런을 뽑지 못했다. 25일 홈런처럼 초구를 공략해 담장을 넘긴 게 2개나 된다. 올 시즌 허정협은 초구를 때려 8타수 4안타(2홈런)·4타점을 올렸다.

"강병식 코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제 장점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제 단점을 보완하는데 온통 신경을 썼거든요. 그런데 코치님은 '힘이 좋으니까 장점을 살리면서 자신 있게, 과감하게 스윙하라'고 조언해 주세요."

▶ 허정협 홈런 일지

허정협 홈런일지

허정협 홈런일지

허정협의 야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부천북초)와 중학교(부천중)를 부천에서 나왔지만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중앙고로 진학했다. 1년 만에 전주고로, 다시 1년 만에 인천고로 전학했다. 고교 시절에는 언더핸드스로 투수였다. 프로지명을 받지 못하고,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로 진학했다.

"저는 잘 던지는 투수가 아니었어요. 공도 빠르지 않았구요. 간절하게 야구를 한 것도 아니었어요."

서건창. 

대학에서 타자로 전향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허정협은 1학년을 마치고 2010년 현역으로 입대(육군 25사단)했다. 야구를 그만둘 마음을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상병 쯤되니까 나가서 뭘 해야할지 막막하더라고요. 고민을 엄청 많이 했던 시기였어요. 그동안 야구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미련이 남고, 후회가 남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야구가 아니면 안될 거 같았어요."

복학 후에 글러브를 다시 잡았다. 야구를 할 수 있는 게 감사하기만 했단다. 대학에서 외야수와 3루를 오가며 활약했다. 누구보다 절실하게 야구에 매달렸다. 2014년에는 대학대표로 선발돼 한미대학야구 친선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드래프트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넥센 구단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함께 했으면 좋겠다."

결국 허정협은 대학 졸업 후 육성선수로 넥센에 입단했다. 잠재력을 엿본 염경엽 전 감독은 허정협을 1군 전지훈련에 데려갔다. 육성선수로 입단한 신인이 1군 전지훈련을 소화한 건 서건창에 이어 역대 2번째였다. 공교롭게도 서건창과 허정협은 동갑내기 친구다. 넥센 주장 서건창의 야구 인생도 허정협 만큼이나 평탄치 않았다. 2008년 LG 육성 선수로 입단했다 1년 만에 방출된 뒤 현역병으로 군 복무를 소화했다. 2012년 돌아와 넥센의 육성 선수가 됐다. 2013년 신인왕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는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넥센은 허정협이 '제 2의 서건창'이 되길 바라고 있다.

▶2015년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당시 인터뷰 영상(https://youtu.be/7UIIQN6kPOQ)


신인왕.


그는 2015년 퓨처스리그에서 타율 0.337, 19홈런·70타점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도 타율 0.337, 12홈런·56타점으로 활약했다. 당시 그의 별명은 '화성 본즈(넥센 퓨처스팀 홈구장인 화성구장의 배리 본즈)'였다. 하지만 1군에만 올라오면 작아졌다. 2015년엔 그래도 6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큰 기대를 안고 1군에 도전했던 지난해에는 13경기에 나와 17타수 3안타(타율 0.176)에 그쳤다. 삼진은 7개나 당했다.

장정식 넥센 감독은 "허정협이 (지난해와) 달라진 거라고는 딱 하나,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장 감독은 "강병식 코치를 졸졸 쫓아다니며 질문을 계속하더라. 너무 붙어다니길래 주의를 준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허정협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술적인 변화는 크지 않았어요. 문제는 멘털이었죠. 그동안 1군에만 올라오면 조급해졌어요. 그러면서 '왜 1군에선 안 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이번 스프링캠프를 경험하면서 정말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대로 편안하게 하라’는 감독님과 코치님의 조언도 큰 힘이 됐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허정협은 팀 동료 이정후(19)와 함께 올 시즌 강력한 신인왕 후보다. 지금까지 상황만 놓고보면 그렇다. 그가 2015년과 지난해 1군에서 뛴 건 17경기(26타석)에 불과하다. 신인왕 자격(5년간 60타석 이하)을 갖췄다. 8살 차이가 나는 후배와 신인왕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신인왕 얘기를 꺼내면 그는 손사레부터 친다. 올 시즌 목표를 물을 때도 마찬가지다.

"시즌 준비를 잘했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매 타석 정말 절실하게 임하고, 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막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잖아요. 그런 이야기(신인왕, 목표)를 들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들지만 아직은 아닌 거 같아요. 시즌 후반쯤 되면 제 목표도 뚜렷해지지 않을까요."

'원샷--.' 야구 속 '한 장면'에 담긴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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