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노량진의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에 가득찬 수험생들의 모습.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일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공시생)은 2011년 18만5000명에서 지난해 25만7000명으로 5년 새 38.9%나 늘었다. 중앙포토
지난해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 대신 공무원 시험을 택한 최모(20)씨. 지난 8일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을 처음 치렀다. 최씨는 "시험지를 받아들고서 참 황당했다"고 말했다.
9급 공무원에 22만명 몰려 경쟁률 35.2대 1 기록 #공시생들 “공무원 소양과 관련 없는 ‘걸러내기’ 문제” #올해 한국사 20개 문항 중 고교 교육과정은 9개 그쳐 #고교 한국사·영어 교사들 “수십년 전 학력고사 연상" #전문가들 “기초 소양, 실무 능력 중심으로 개편해야”
최씨는 수능 영어에서 2등급을 받아 '영어엔 비교적 자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공무원시험 영어 과목엔 의학·생물학·심리학 등을 묻는 난해한 지문이 이어졌다.

2017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에 출제된 영어 독해 지문. 일부 수험생들은 "'taste buds(미뢰)'라는 단어는 우리말로도 들어본 적이 없어, 영어 본문을 전부 독해한 뒤에도 파악이 잘 안됐다" "영어 실력과도, 공무원 실무 능력과도 관련 없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터뜨렸다.
최씨는 “‘taste buds'(미뢰·맛을 느끼는 감각세포가 몰려 있는 세포)’의 과학적 특징을 설명한 10번 문항의 독해 지문을 읽다가 짜증이 났다"고 했다. 그는 "9급 행정직 공무원이 ‘미뢰’에 대한 영어 지식을 써 먹을 일이 있을지 의문”이라고도 했다.
공시 ‘5수생’ 이모(39)씨는 한국사 문제들을 풀다 황당함을 느꼈다. 한국사 19번은『조선민족사 개론』이란 책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보기로 들며 저자에 대한 설명을 선택하게 하는 문항이었다. 5년간 한국사 교재와 문제집 수십 권을 공부했지만, 책 제목이 낯설어 저자가 누군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시험 뒤 학원 강사에 묻자 “일제 강점기의 사학자 손진태(1900~?)가 쓴 글인데, 나도 처음 봤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씨는 “매년 이처럼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문제들이 나온다. 왜 이런 문제를 내는지, 어디까지 공부해야 합격이 가능한지 종잡을 수 없다”고 난감해했다.
매년 공무원 시험 응시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묻는 현행 공무원시험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공무원에 적합한 소양이나 직무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몰려든 응시자를 걸러내기 위해 변별력만 감안해 출제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총 다섯 과목, 4지선다형 100개 문항을 100분 안에 풀어야 하는 9급 필기시험이 도마에 오른다.
지난 8일 시행된 2017년 국가직 9급 공무원 필기시험엔 총 22만8368명이 원서를 냈다. 경쟁률은 35.2대 1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시험 직후 응시자들은 온라인 카페 등에 한국사·영어 등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대부분 “비비꼬인 문제 때문에 아는 것도 제대로 못 풀었다”“뭘 묻는지 아리송한 문제가 많았다”는 하소연이었다.
![서울 노량진동 학원가 공시생들이 적은 '나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26/58fca8be-bc26-4fc0-bfd9-389c31f47a09.jpg)
서울 노량진동 학원가 공시생들이 적은 '나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 [중앙포토]
본지는 중·고교 현직 교사 6명에게 최근 3년 간 9급 시험에 출제된 한국사·영어 문제의 검토를 의뢰했다. 국사 교사 3명의 분석에 따르면 올해 출제된 한국사 문항 20개 중 고교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것은 9개에 그쳤다. 정부가 수년 째 고졸 학력자의 공무원 채용을 장려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중·고교에서 한국사를 20여 년간 가르친 이병환 덕양중 교사는“고교 교육과정에서 출제된 9개를 제외한 다른 문항은 솔직히 나도 풀기 어려운 수준이다. 몇몇 문제는 인터넷으로 검색하고서야 답을 찾았다”고 말했다.

2017 국가직 9급 한국사 3번 문항. 중·고교 교사들은 "조선시대 오가작통법을 묻는다는 출제 취지와 달리 재지사족·향권·구향·신향·향전 등 생소한 용어가 나열돼 수험생에게 혼선을 준다"고 지적했다.
응시자의 혼란을 초래하는 문항도 많았다. 교사들은 조선 시대 오가작통법에 대한 사료를 제시하면서 <보기>에서 제도의 시행 목적을 고르게 한 3번 문항을 예로 들었다. 보기에는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 자치 활성화’, ‘향권을 둘러싼 구향과 신향 간의 향전 억제’ 등이 포함됐다. 이병환 교사는 "오가작통법을 알고 있는 응시자도 보기에 나온 ‘재지사족’ ‘향권’ ‘구향’ ‘신향’ 같은 생소한 단어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고 지적했다.
명칭·연대의 단순 암기를 요구하는 문항도 있었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고르는 10번 문항의 보기엔 은주시청합기(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측 문헌),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메이지 시대 일본 관리들의 보고서) 등이 나온다. 이 교사는 “이 같은 단순 암기형 문제는 학교 내신 시험에도 출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2017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과목 1번 문제. 제시문에서 ㄱ은 설총, ㄴ은 최치원임을 파악한 뒤 두 인물이 신라 골품제 중 6두품인 사실을 유추해 보기 중에서 맞는 것을 고르는 문제다. 보기 중에 언급되는 관등에 따른 복색은 고교 교육과정에서 다뤄지나 고교에서도 암기를 권하지 않는다. 정답인 보기 ④의 '중위제'는 고교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다.
영어 시험에 대한 교사들의 평가도 한국사와 비슷했다. 영어교사들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학습을 조장하는 문제들”(박민영 부일외고 교사), “수십년 전 대학 예비고사, 학력고사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다”(신명석 세종고 교사)고 평했다.
박민영 교사는 ‘uncanny(이상한)’의 동의어를 고르는 2017년 2번, ‘stick your nose in(쓸데없이 참견하다)’의 의미를 묻는 2016년 11번, ‘at the drop of a hat(즉시)’와 유사한 단어를 고르는 2015년 12번 문항 등을 예로 들었다. 박 교사는 “문맥상으로 짐작이 어려운 고난도인 데다 자주 쓰는 표현도 아니어서 굳이 출제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올해 출제된 영어 15·16번 문항은 보기 중에 ‘우리말을 영어로 잘못 옮긴 것을 고르시오’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런데 15번은 우리말과 영문의 의미가 다른 문장을, 16번은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고르는 문제였다. 안성환 대진고 교사는 “이렇게 불분명하게 물으면 필요한 지식을 갖춘 수험생도 실수하기 쉽다”고 지적했다.
올해 시험엔 생활영어 문제로 옷 환불, 혈압계 사용법이 출제됐다. 신명석 교사는 “공무원 시험의 취지와 맞게 민원인과의 대화 등을 출제하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그동안 시험 문제 오류는 한 번도 없었다. 명확한 근거에 의해 논란 없는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현행 공무원 시험과 관련해 다수 지원자 중 소수 합격자를 가리기 위해 변별력을 강조하고, 출제 인원이 적으며 출제 기간이 짧다는 점이 지적된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9급 공무원 시험은 과목당 대학교수 2명으로 구성된 출제위원이 16일간 합숙 하며 출제한다. 한편 대입 수능은 과목당 5~10명이 한달간 합숙해 출제하고, 이와 별도로 4명의 검토위원이 15일 간 검토한다.

전문가들은 공무원으로서의 소양을 묻는 출제 방식으로 개선하고 공통과목은 자격 시험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백종섭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무원 시험은 공무원으로서의 소양과 역량을 살핀다는 본연의 취지에 맞게 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공통 과목은 토익·토플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으로 대체하고, 일반행정직·기술직·사회복지직 등 응시자가 지원한 분야에 밀접한 과목은 서술형·논술형으로 평가할 것"을 제안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필기 대신 면접 비중이 큰 선진국 방식을 참조하자"고 제안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정부 채용 사이트(www.usajobs.gov)에서 공무원 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자가 이력서를 내면 해당 기관이 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쳐 선발한다. 채용 후 1년간 임시직으로 일하며 실적이 입증된 뒤엔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김 교수는 "변별력만 강조한 필기 위주의 '떨어뜨리기' 전형으론 창의력과 인성을 겸비한 인재 선발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9급 시험은 다른 직급에 비해 많은 인원이 응시하는 만큼 작은 변화에도 수험생에게 큰 혼란과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시험 과목이나 체제 변화는 신중을 기해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