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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오늘 밤 TV토론도 봉숭아 학당 만들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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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치러지는 졸속 대선이다. 후보들에 대한 엄격한 검증의 필요성이 지금처럼 절실한 선거도 없을 것이다. TV토론은 후보자들을 근접 카메라에 노출시켜 그의 성격과 표정, 국정철학과 정책, 상황파악 및 위기대처 실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을 꼼꼼히 따져보고 비교하는 최상의 검증 무대다. 2012년 박근혜 후보를 걸러내지 못한 것은 대선 TV토론의 중대 실책이었다.

물타기, 규칙위반, 감정적 비난은 그만 #5월 초 ‘유력 후보 토론’도 검토하길

엊그제 중앙선관위의 선거방송토론위가 주최한 5명의 후보자 토론은 앞서 있었던 두 차례 방송 토론보다 더 퇴보한 모습이었다. 공약이나 핵심 검증 사안에 대한 논쟁은 실종되고 비난, 감정, 편짜기와 말싸움이 난무하는 수준 이하의 장면들이 연출됐다. 후보자들은 무엇보다 유권자가 알고 싶어하는 주제에서 일탈했다. 유권자의 알권리는 무시당했다.

이번 선거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문재인 후보의 ‘북한 인권결의안 대북 문의 논란’에는 홍준표·유승민 후보의 질문에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끼어들어 물타기를 했다. 이 때문에 심 후보가 ‘언제부터 문재인의 도우미가 됐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유승민과 심상정 후보는 1, 2위 주자인 문재인·안철수 후보를 배제하고 자기들끼리 20분간 공방전을 벌여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안철수 후보 역시 문재인 후보를 향해 “내가 갑철수냐, 안철수냐” “내가 MB의 아바타냐”라는 엉뚱한 질문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부인과 딸의 갑질·재산 논란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유권자의 보편적 관심과는 동떨어진 방어적 태도로 일관했다. 평소 본인이 강점으로 주장했던 교육, 미래, 혁신,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생산적 논의를 하지 못한 건 자업자득이다. 안철수 후보와 떠다니는 보수 표심을 나눠 갖는 것으로 평가되는 홍준표 후보에겐 세 명의 후보로부터 사퇴 요구가 이어졌다. 그의 대학 시절 소위 ‘돼지 흥분제’ 사건이 사람들의 분노를 사면서 벌어진 일이긴 한데 전 국민을 상대로 대한민국 대통령감을 테스트하는 자리에서 이런 품격 낮은 토론이 오고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번 대선의 TV토론은 사회자의 관여를 최소화하고 후보 간 직접 토론이 최대한 허용되는 발언총량제 방식이 도입됨으로써 5년 전에 비해 역동성·긴박감이 커지고 후보 간 비교가 용이해진 장점이 있다. 반면 후보자들이 토론의 규칙과 주제를 존중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떠들어 댈 경우 유권자의 혼란이 얼마나 가중되는지도 여실히 알게 됐다. 후보자들은 오늘 저녁에 있을 방송 토론을 또 한번 봉숭아 학당처럼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길 바란다.

더 이상 ‘초등학교 반장 선거’ 같은 토론은 보고 싶지 않다. 유권자들도 그제 38%를 기록한 높은 시청률에 걸맞은 제대로 된 TV토론을 희망하고 있다. 5자 후보 간 마지막 토론은 5월 2일로 예정돼 있다. 선거일인 9일까지 비어 있는 1주일 사이에 방송사 연합으로 유력후보들만 따로 초청해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중앙선관위도 법적 문제가 없다고 유권해석하고 있다.